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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맛과 멋 그리고 성지순례] 강화도 갑곶돈대순교성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18 조회수614 추천수2 반대(0) 신고
 
 
구한말 신앙선조 피흘린 '순교의 섬'
 
 
 

  강화도는 선사시대 고인돌부터 구한말 서구열강에 맞선 항쟁 유적까지

 

한반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 창고'다. 코끝을 휘감아 도는

 

짭쪼름한 갯내음과 갯마을 풍경도 도시 먼지에 막힌 숨통을 확 트여준다.

 어디 그뿐인가. 바다와 갯벌은 철따라 다양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요

 

즘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왕새우가 제철이다.

 

 또한 신앙인에게는 구한말 신앙 선조들이 피흘린 '순교의 섬'이다.

 서울 도심에서 1시간30분 정도 달리면 강화도 초입인 강화대교에 닿는

 

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갑곶 순교성지가 나온다. 갑

 

곶(甲串)은 조선시대 수군 진영이 있던 자리로 구한말 신앙 선조들이 이곳

 

에 잡혀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성지에 들어서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다킹 신부'로 통하는 조명연(마

 

태오) 신부가 반갑게 맞아준다.

 조 신부는 오래전부터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목

 

소리가 느끼할 정도로 상냥해서 '빠다킹'이란 애칭이 붙었다. 그런데 조 신

 

부는 미사시간을 빼고는 늘 작업복 차림이다. 혼자서 2년 가까이 성지를 가

 

꾸느라 막노동꾼이 다 됐다.

 

 조 신부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휙 둘러본 뒤 기념품 사갖고 빠져

 

나가는 성지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성지는 심신이 지친 이

 

들이 위로를 얻고, 가정이든 직장이든 자신의 자리를 성지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갑곶에는 대형 십자가와 순교자 3위 기념비,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외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조형물은 없다. 맛에 비유하면 조미료를 넣지 않

 

은 담백한 맛이 나는 성지다.

 

 잔디밭 한쪽에 있는 대형 십자가 아래서 기도한 뒤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성지지기' 조 신부와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다. 강

 

화대교가 건너다 보이는 벤치 분위기가 참 아늑하다. 벚꽃 피는 봄이면 운

 

치가 더할 것 같다.

 

 이곳 기념비의 주인공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순교한 우윤집ㆍ

 

최순복ㆍ박상손이다.



 

 당시 미국 함대는 5년 전 평양에서 조선인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를 불태운 책임을 물으면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병인년

 

(1866년)에 천주교 박해의 칼을 한차례 휘두른 흥선대원군은 이를 거부하

 

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가면서 교인들을 잡아들였다.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서 물러나자 대원군의 아들 고종은 천주교인들을

 

더욱 철저히 색출해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바람에 미국 함대에 승

 

선한 적이 있는 3명이 가장 먼저 붙잡혀 이곳에서 처형됐다. 좌영장(左營

 

將) 홍재신은 백성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 주기 위해 그들 목

 

을 나루터 말뚝에 매달았다.(「승정원 일기」 고종 8년 6월1일 기록)

 

 그러나 목이 베인 교인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 3명 이름 뒤

 

에 '등(等)'자가 붙어 있다. 또 「좌우포청등록」에는 문초를 받은 자가 40

 

여명, 그 중 효수형 9명ㆍ참수형 3명ㆍ교수형 1명으로 기록돼 있다. 나머

 

지 30여명에 대한 형벌기록이 없다. 당시 천주교인 처벌은 선참후계(先斬

 

後啓,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아뢰는 것)가 흔했기 때문에 재판 형식을 제

 

대로 거쳤을 리가 없다.

 

 갑곶이라는 지명 유래가 흥미롭다. '곶(串)'은 지명 밑에 붙어 바다나 호

 

수에 뾰족하게 내민 땅을 뜻하는데 갑곶은 몽골 장수가 강화도 공략 당시

 

폭이 좁은 강을 가리키면서 "우리 갑옷만 쌓아도 건널 수 있다"고 한데서

 

유래한다는 구전이 있다. 하지만 물살이 세서 강 건너 병영을 무너뜨리지

 

못했다고 한다.

 

 성지에서 매일 오전 11시에 미사가 봉헌된다(화요일은 미사 없음).

 성지 옆에 강화역사관이 있다. 제4전시실에는 구한말 서양 세력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항쟁역사 유물도 전시돼 있다. 자녀를 데리고 가면 '순교'와

 

'호국'의 충돌에 대한 설명을 따로 해줘야 할 것 같다. 문의: 032-933-

 

1525.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갑곶 순교성지에 묘가 한 기 있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베드로, 1830~1911) 묘다. 만일 그가 없

 

었더라면 박해사의 상당 부분이 유실됐을 것이다.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

 

방 신부 등의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에 안장했다. 부친은 몇년 뒤 시신을 선

 

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고 아들 박순집에게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

 

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알려 드려야 한다"고 일렀다. 박순

 

집은 1901년 삼성산 순교자 시신 발굴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에 살던 그는 17살(1846년)때 김

 

대건 신부가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하기

 

도 했다.

 

 

 훈련도감 군인이 된 그는 또 병인박해 때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

 

푸르티에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후 몇몇

 

신자들과 새남터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

 

형의 시신도 수습해 매장했다.

 

박해의 광풍이 멈추자 그는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데도 관여했다.

 

 1888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조선 순교자 행적을 조사할 때 그

 

는 교회 법정에서 자신이 목격하고 들은 것, 시신을 묻은 곳 등을 상세히

 

진술했다. 그가 행적을 밝혀낸 순교자는 150명. 그의 증언록(병인사적 박

 

순집 증언록)은 절두산 순교자기념관에 있다.

 

 그의 딸은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입회한 한국인 최초의 수녀 5명 가운

 

데 한 명인 박황월 수녀다.

 

 그는 말년에 인천으로 이사해 전교활동에 힘쓰다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했다.

         -  성지에서 바라본 강화대교 모습-


 


<갑곶돈대순교성지 가는 길 >

 ▶서울외곽 순환 고속도로= 김포 나들목(김포IC)에서 김포/강화 방면으

 

로 나와 48번 국도 강화쪽으로 직진하면 김포시청-마송-강화대교-갑곶돈

 

대순교성지까지 40분~1시간 정도 걸린다.

 

 ▶88 올림픽 도로= 88도로 끝에서 김포/강화 가는 길을 따라 좌회전 한

 

후에 첫번째 분기점에서 우회전해 제방도로를 따라 가거나(두번째 분기점

 

은 매립지 도로임), 세번째 분기점에서 48번 국도로 바꿔 타고 계속 직진하

 

면 강화대교-갑곶돈대순교성지에 도착(40~50분 정도 소요).

 

 ▶대중교통= 강화도행 시외버스를 타고가다 강화대교 건너 현대아파트

 

앞에서 내려 강화역사관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성지안내표지판이 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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