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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설화(雪花)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29 조회수1,140 추천수10 반대(0) 신고
11월 29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루카 10장 21-24절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설화(雪花)>


겸손한 사람에게 있어 한 분야의 통달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또 다른 분야에 대한 탐구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무한한 인간의 능력도 발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철저한 인간의 한계도 체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오묘하심과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함 앞에 승복합니다.


제대로 뜻을 이룬 대학자나 대영성가들이 걸어갔던 깨우침의 길이 그러했습니다.


반대로 ‘날라리’, ‘설익은’ 사람들의 과정은 요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쌓여가는 나이, 알량한 경험, 축척된 나름대로의 전문성, 쌓아올린 업적...이런 것들이 얼마나 그들을 교만하게 하고, 경직되고 완고한 삶에로 이끄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역설적인 한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들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문제의 핵심은 ‘롭다는’에 있는 듯합니다.

‘롭다는’ 이라는 의미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은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지혜와 슬기를 갖춘 사람이 아니라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 슬기롭다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 슬기롭다는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늘 ‘하느님에 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머리로서, 생각으로서, ‘다른 사람의 지식’을 통해서 연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연구한 하느님은 단지 연구의 산물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하느님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느님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책속에 계시는, 상상 속에만 자리 잡고 계시는 너무나 먼 하느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에 대한 대구가 되는 단어로 ‘철부지’라는 단어를 쓰시고 계십니다.


철부지의 사전적 의미는 ‘철이 들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눈치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와 ‘슬기’를 전혀 갖추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완전히 반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합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세상을 계산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들 에게는 가식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이 100% 고스란히 그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일,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일, 메시아를 직접 대면하고 그분이 선포하는 말씀을 직접 듣는 일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 꿈꾸어오던 일이었습니다. 조상들에게 있어서도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더 불행한 일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이제 그 오랜 숙원이었던 메시아께서 바로 그들 눈  앞에 생생하게 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묘하게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들은 어린이들이었습니다. 바보취급 당할 정도로 순수하고 정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이었습니다. 창녀들이었습니다. 최하층 천민들이었습니다.


결국 지복직관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은 영혼의 순수함입니다. 가식을 떨쳐버린 투명한 시선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늘 맑고 투명한 시심(詩心)을 잃지 않으시는 존경하는 오세영 시인께서 최근 새로운 시집을 내셨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눈꽃처럼 순수한 언어, 순수한 표현, 순수한 사랑을 역설하시는 그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꽃나무만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에 핀 설화를 보면 안다.

누구나 한 생애를 건너

뜨거운 피를 맑게 승화시키면

마침내 꽃이 되는 법”

(‘설화’ 참조)


“지상에 떨어진 별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더러는 불 타 허공에 사라지고

더러는 죽어 운석으로 묻히지만

나는 안다.

어디엔가 살아있는 별들도 있다는 것을.

깊은 산속 구름 호젓하게 머물다간 자리에

아아,

날개 상해 떨어진 별들이

한 무더기 도라지꽃으로 피어있구나.”


-시집 <꽃피는 처녀들의 그늘아래서> 고요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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