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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묵상글
작성자김윤홍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30 조회수909 추천수2 반대(0) 신고
2005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로마서 10,9-18
형제 여러분, 9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복음 마태오 4,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참 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글쎄 벌써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 어떤 분의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올 해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쉬워했었는데, 이제는 정말 마지막 한 장의 달력밖에 남지 않았네요. 더군다나 어제는 이곳 강화도에 첫눈이 왔답니다. 떨어지는 첫눈을 바라보면서 ‘이제 본격적인 겨울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2005년도 이렇게 보내는구나.’ 라는 아쉬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달력만 쳐다보면 매번 후회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만족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아쉬움을 갖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감사의 마음을 전혀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비록 아쉬움의 순간이 드는 12월을 내일이면 맞이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12월인 만큼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바깥에 있었답니다. 어제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도 말씀드렸듯이 얼마 전 심었던 나무들이 모두 뽑혀서 그것들을 세워서 다시 심는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동네의 조경하시는 분을 불러서 했답니다. 나무가 워낙 커서 저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었거든요. 아무튼 이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그냥 놔두고서 저 혼자 안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지에 옮겨 심어야 할 나무들을 새롭게 심고, 자른 나무들을 구석에 모아서 정리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러면서 일하시는 분들과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잘 모르는 부분까지도 친절히 가르쳐 주셔서 많이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고용주의 입장에서만 서서 “알아서 일하세요.”하고서 저는 따뜻한 방구석에만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이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없는 것은 물론, 제가 보고 있지 않으니까 이분들도 대충 대충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비록 많은 부분에서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밖에서 함께 했기에, 저 역시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은 물론 깔끔하게 정리된 나무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네요.

그래요. 어쩌면 조금만 더 정성을 쏟으면, 조금만 함께 하려는 노력만 한다면,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라는 완고한 마음 때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장소는 어디였나요? 바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갈릴래야 호수였습니다. 즉, 그들의 일터였던 것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고 이제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제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스승님이 직접 찾아와서 제자를 부른다는 것. 사실 어떤 스승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스승이 아쉬운 것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자들이 좋은 스승을 쫓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찾아가는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망설임 없이 곧바로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 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떠한가요? 예수님도 직접 사람들 곁으로 가는데, 예수님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우리들은 사람들 위에 서려는 이기적인 행동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1월의 마지막 날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아들입시다.



얼굴('생각하는 글' 중에서)

그 상가의 5호 가게에는 늘 손님이 끓었으나 건너편에 있는 3호 가게는 파리만 날릴 뿐이었다.
3호 가게 주인은 유심히 5호 가게를 관찰하였다.
가게 주인이 예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게의 물건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웃 장로를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가게 터가 나빠서도 아니고 물건이 나빠서도 아니오. 손님이 들지 않는 이유는 당신 얼굴에 있소.”
3호 가게 주인이 말했다.
“저 가게의 주인은 저보다 그다지 예쁘지 않은 걸요.”
장로가 대꾸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지 않고 표정에 있는 것이오.”
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 말을 명심하십시오. 웃는 얼굴에는 화살도 비켜갑니다.”

그날 이후, 3호 가게에는 날로 손님이 들끓고 번창하였다.
새로 장사를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 가게를 살펴보았더니 주인의 책상 위에 이런 글귀가 놓여 있었다.
‘하루를 가장 잘못 보낸 날은 웃지 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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