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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3주일 강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5-12-09 조회수822 추천수2 반대(0) 신고
주님은 더욱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요한 3,30)
예수님, 저는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
모든 성인들과 천사들의 기도와 선행도 한 대의 미사와 비교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저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저의 전부가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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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3주일 강론]


찬미 예수님!

예전에 PC통신에서 가톨릭 동호회 활동을 할 때, “광야”라는 대화명을
쓰시는 형제님을 알게 되
었습니다. PC통신을 통해서 온라인 상에서
만날 때에는 몰랐는데, 동호회 회원들이 함께 얼굴을
보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그분이 뇌성마비를 앓는 장애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삼 그분의
대화명인 광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자신의 장애가 자신을 외롭고 힘들
게 만들지만, 어쩌면 그 안에
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 광야 형제님에게 그 대화명의 의미를 직접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광야는 그야말로 적막하고, 메마른 곳입니다. 사막처럼 모래
뿐인 장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물이 흐르고 초목이 우거진 곳도 아닙
니다. 왜 하필 세례자 요한은 “광야”라는 공간을 이야기했을까요?

보좌신부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힘들다고 느낀 것 가운데 하나는,
미사를 마치고, 혹은 회합이나 모임을 끝내고 사제관에 올라와서 방에
들어왔을 때, 조금 전까지의 떠들썩함이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던
상황과는 너무도 다른 적막함이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외로움이기도
했고, 가끔은 어떤 그리움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경험에
관해서는 선배 수사님들에게도 많이 듣긴 했지만, 막상 제가 그 상황에
놓였을 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 오히려 그런 적막함이 더 편하게 느껴졌습니
다. 그리고 그 고요함 안에서 직무에 대한 봉사로서가 아닌, 저와 마주
대하고 있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 이전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때로는 예수님의 친구나 제자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바로 그
적막한 곳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홈페이지의 제목은 “앞문은 세상으로, 뒷문은 광야로”
입니다. 조금은 우습게 들릴 수 있지만, 수도원은 그런 공간이라고 생각
합니다. 세상을 향해 열려있되, 하느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는 곳,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로 인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수도자나 성직자 역시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존재
라는 점에서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광야가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스쳐지나간 자신의
삶을 고요함 안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대림 3주일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진 광야를 살펴보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얼마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마주 대하는 시간들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아직 “광야”를 갖고 있지 않다면 내 안에 작은 자리를
비워둬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초반부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
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빛은 아니지만, 빛을 증언
하는 사람....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몇몇 교부들은 교회를 달에 비유했습니다.
그 자체로 빛을 내진 않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서 세상을 밝히는 달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반사체로서 세상 안에 복음을 전하는 존재라는 것입
니다. 때로 교회가 자신이 반사체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 교회는 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습니다. 또한 반사체로서의 역할에 소홀할 때에도 역시
자신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인들 역시 교회의 지체인 동시에, 달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반사하지 못한다면, 혹은 그분의 거룩함을
자신의 거룩함으로 착각한다면 그는 온전히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빛은 아니었지만, 빛을 증언하고, 자신을 통해
다른 이들을 믿음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신앙인은 때로 그
자신이 하나의 교회로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믿지 않는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수도 있고, 어쩌면
교회를 멀리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대림 3주일은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은 흔히 생각하듯 물질적인 재물로
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말을 들어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또 때로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자선입니다.
물론 물적 여유가 있다면 그 재화를 어려운 이들, 필요한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반사체로서 우리는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대림 3주간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내 삶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전하며, 그 사랑을 드러내어 이웃들
을 구원에로 이끄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랑을 충실하게 삶으로 선포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자신의 영성생활에 충실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 http://예수.kr  ,  http://www.catholic.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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