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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너진 성(城)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5-12-14 조회수1,000 추천수12 반대(0) 신고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루카 7장 24-30절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무너진 성(城)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요즘 너무 안타까운 풍조가 하나 있습니다. 나이나 연륜, 경험이 쉽게 무시되는 현상입니다. 지혜의 원천이자 보고(寶庫)인 노인들에 대한 존경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전기물에서도 인생의 절정기에 대해서는 침이 마르도록 소개하고 있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대해서는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고 삽니다. 노년은 실패가 아닌 성취란 사실을. 소멸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란 사실을. 물러섬이란 패배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란 진리를. 무너진 성(城)도 충분히 생동감 있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늙고 스러지는 것들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지를 망각하며 삽니다.


쇠약해진다는 것은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시계와 같습니다. 쇠락을 거부한다는 것은 삶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루카복음사가는 계속해서 쇠락의 과정을 걷는 세례자 요한의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아주 훌륭한 인물, 큰 인물로 소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명료하게 선을 긋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때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청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만일 계속해서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고 ‘버티기 작전’으로 나갔다면 예수님께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세례자 요한은 분위기를 잘 파악했습니다.


떠나야 할 순간이 오자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처럼 떠나간 세례자 요한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부담 없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세례자 요한의 신원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보라 네 앞에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놓으리라.”


세례자 요한은 철저하게도 사자(使者)였습니다. 사신(使臣)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보낸 사람의 의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보낸 사람이 기뻐할 일, 자신을 보낸 사람에게 득이 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자가 주인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는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길은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실 주인공이자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우리 수도자들, 사제들,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도 사자입니다. 주님께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파견하신 사신입니다. 사목에 임하면서, 대상자들을 만나면서 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한다든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든지 해서는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파견하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분께서 기뻐하실 일을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사신으로서의 자세이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닦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서 점점 성장하시도록 우리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는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바닷가에서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오세영,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시와 시학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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