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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 됨의 기쁨과 고통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12-29 조회수687 추천수5 반대(0) 신고

 

 

                                             하나 됨의 기쁨과 고통

 

◐*하나 됨의 기쁨과 고통*◑


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필요(必要)한 존재이면서도

고통(苦痛)스러운 존재다.


사람이 언제 개나 돼지, 소나 닭 때문에

속상하거나 고통당해 본 적이 있던가.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전갈이나 독수리 때문에 어려움 당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누이와 백성들로 인해

자신의 구원조차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모세와 버금가는 바울도

이방사람이 아닌 동족인 유대인들로 인해

수많은 어려움을 당했었다.


그 가운데서도 사사건건 그를 괴롭혔던

알렉산더에게 ‘그가 갚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당부까지 했었다.



오랫동안 공직에 있다가 은퇴하신 분이

자서전식으로 책을 한 권 내셨는데

그 내용 중에 특이했던 것은

살면서 조심해야 될 사람에 대한 대목이었다.


-말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칭찬하고 뒤에서는 흉보는 이중인격자

-매사에 반대만 하는 사람

-큰소리만 치면서 책임지지 않는 사람

-남의 직업을 우습게 보는 사람

-의도적으로 일을 훼방하는 사람

-남에게는 대접하지 않으면서도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 등이었다.


어떤 관계에서든지 이런 사람은

눈에도 잘 뛸 뿐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공동체 전체는 몸살을 앓게 된다.


그러나 더 정직하게 말해서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 책을 쓰셨던 그 분은

이런 사람이 본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었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판단하고

피하라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 해를 보내면서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역시나 가장 가슴 조이게 했던 일은

인간관계로 인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다.

때론 단 한 사람 때문에

일이 어려워지면서 잠을 설치게 한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많지만 소시민적인 사람들은

가족을 생각해서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지만,

이사(移徙)하는 날 가슴에 묻어 주었던

말을 반드시 하고 떠날 것이라는

상상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른다.





이렇게 연약하면서도 강퍅한 인간들을 위해

예수는 탄생(誕生)하신 것이다.

성탄은 신이 인간과 하나 되는 사건(事件)이다.

 

신(神)과 하나 되고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되는 일처럼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 됨은 가장 숭고(崇高)한 삶의 결정이요,

영원한 언어의 최고 가치가 된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 되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는커녕

가족끼리도 아니 부부간에도 하나 되는

일이 매번마다 힘들게 느껴지면서

자책(自責)하며 산다.


어리석게도 사람은

하나 됨의 아름다움은 몸으로 바로 느끼면서도

정작 자신이 하나 됨에는 미련할 정도로

무지하고 신경 자체를 안 쓴다.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다 비슷하나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곧 생각이나 운명(運命)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제각기의 외침으로만 이어온 이기적인

역사 속에 살아왔기에 아픔 속에서도
 

하나 됨 보다는 반목(反目)하고

대적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즐기고 있다.




사람은 크게 세 타입으로 분류한다.


먼저 원초적인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생물학적 인간이 있다.

이런 스타일은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기에

사람들이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아예 무시해 버린다.



가장 문제가 되는 타입은

이론과 합리적(合理的)인 삶을 즐기는

철학적(哲學的) 인간에게 있다.


이것은 희랍 인간론으로

사람의 특성을 이성에서 찾는 부류다.

우주의 본질도 이성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주장이다.


한술 더 떠서 이성적인 사람과

신(神)은 동일한 존재로까지 보기에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판단은

항상 최선이라고 생각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하고 그렇게 서로 간에

평행선(平行線)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성(理性)도 물론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다.

그것은 말씀(Logos)에 따라 서로 섬기며

사랑하기 위한 합리적인 도구건만,

선악과를 따 먹은 조상처럼 판단만 할 뿐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양보하는 모습이 없기에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결국 이성지상주의는

감성(感性)의 문제보다는

죄와 죽음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취하므로

한계(限界)점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스스로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크나 큰 맹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인간의 대안이 바로

신학적(神學的) 인간이다.


성탄(聖誕)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능적 인간과 철학적 인간을

신학적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이 천년 전에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던 것이다.


과학은 세상의 발생,

사람의 생성과정들을 현상적으로 설명

할 수 있으나 인간존재 의미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신학적인 인간이란

신은 사람과 인격적인 사귐과 사랑의 관계를 가지려고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피조자로서의 존재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야만 도무지 하나 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 관계(關係) 안에서

삶의 목적(目的)과 기쁨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복된 인간의

참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무너진 우리와 다시 하나 되시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셨다.


분리되어진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에는

이 방법 외에는 어떤 것도 없었던 것이다.




가정이 화목(和睦)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밀알처럼 썩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공동체가 하나 됨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코 익명(匿名)의 헌신이 기초되고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만약 집이나 어느 공동체에서

재미가 없다고 느낀다면

분명 자아(自我)를 버리지 않고

여전히 이성으로 살아가는 철학적 삶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주여,


성탄절에

당신은 우리에게

하나 됨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둘이 하나 됨은

각자 꿈꾸며 걷던

지루한 긴 행진을 잠재우고

그 속에서 함께 라는 것을 통해


땅에 살면서도

높은 하늘의 또 다른 신비를

창조하게 하십니다.



당신은

획일성이 아닌

하나 됨을 원하십니다.


오늘도

그 하나 됨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과

사소한 차이들을 내려놓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고민하게 하소서.



-피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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