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고요한 호수가 되어"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02 조회수85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1.2 월요일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1요한2,22-28 요한1,19-28

                                                      

 

 

 

 

     "고요한 호수가 되어"

 

 

몇 해 전, 삶이 아주 고단했을 때

써놓고 위로 받은 ‘호수가 되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라는 시입니다.

 

하늘향한 무수한 나뭇가지들, 하느님 찾는 수도자들처럼 고단해 보였습니다.

 

‘하느님 찾는 사람’의 노력만 생각하다가
불연 듯 ‘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은총이 생각나면서,
나무에서 호수로서의 반전이 이루어졌고 무한한 위로와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이미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 이게 성탄의 신비요,
이런 하느님 진실하심의 체험이, 좋으심의 체험이, 아름다우심의 체험이
풍요로운 영성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아마 다음 시편 말씀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 들여라.
복되다, 주님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비상한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일상의 진실한 모든 것,
좋은 모든 것,
아름다운 모든 것을 체험해 가면서
진선미(眞善美)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축적된 체험의 보고(寶庫) 있어 진정 부자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 1서의 말씀, 확연히 이해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은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1요한2,24-26).”

 

매일 매순간이 처음입니다.
비단 처음 들은 것뿐만 아니라,
매일 매순간 듣고 깨달은 것을,
하느님의 진실하심,
좋으심,
아름다우심 체험한 것을 우리 안에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참으로 넉넉한 내적 공간인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물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깨닫게 되는 놀랍고 고마운 역설적 진리가 있으니,
우리 안에 하느님 머물 때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됨으로 온전한 일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고 매일 미사 안에서 그대로 실현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주님 머무실 수 있는 마음의 내적 공간입니다.

이런 내적 공간에 하느님 현존으로 충만할 때 진정 부자이고,
소유물의 집착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하느님 잊을 때 내적 공간은 오만 잡생각으로 채워져 복잡 혼란하고,
내적 목마름은 밖의 소유물들로 외적 공간을 채우게 됩니다.

 

과연 넉넉한, 하느님 현존으로 충만한 내적 공간을 지니고 계십니까?
예로부터
사막의 침묵과 고독의 광활한 외적 공간을 찾았던 사막의 수도자들,
바로 외적 공간에 상응하는 
풍요로운 내적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내외적 공간은 허무의 심연이 되겠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사랑이신 하느님 현존의 충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제 하느님의 자녀인 수녀님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1요한2,28).

 

매일의 성무일도와 미사시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며
내면을 풍요롭게 돌보고 가꾸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머물 때 또렷해지는 나의 정체성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
침묵과 고독의 광야의 주님 현존의 공간에서 정화되고 순화되어
또렷해진 그의 정체성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라는 물음에, 기탄없이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라고 자기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7).”
이런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를 아는 겸손’의 정체성은 주님 안에 머물러 살 때 가능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의 느낌은
‘나라가 참 작고 좁아 답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작고 좁은 외적 공간의 이 땅에서
크고, 넓고, 깊게 살 수 있겠느냐?’가 화두처럼 다가 왔습니다.

 

답은 내적 공간 확보에 의한 내적 자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내 안에 그리스도 모시고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여기 수녀원에서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아파트 높은 산이라 저절로 눈 들어 하늘 보게 됩니다.

 

그러니 하늘이신 하느님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하느님 찾는 일에 지칠 때,
고요한 호수가 되어 통째로 하늘이신 하느님을 담아버리십시오.

 

아예 하늘마음, 하느님 마음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
주님 안에 머무는 시간이자,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이신 주님을 담아 모시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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