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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39)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1쪽 부터 5쪽까지)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0 조회수693 추천수4 반대(0) 신고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1쪽 부터 5쪽까지)

                                                     이순의

 

 

<문장의 기술은 부족할지라도 쓰기는 열심히 썼으며 이 시대의 누군가는 살고 있을 이야기를 제 부족한 솜씨로 완성해 보았습니다. 묵상글은 아니구요. 순수창작 소설입니다. 그 안에서 묵상할 것이 있다면 안으시고 묵상할 것이 없다면 그저 지어낸 이야기 한 토막의 재미를 즐기시라고 알려드립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마련한 것이므로 사랑하는 벗님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굿뉴스의 벗님들께 이 시대의 누군가 살고 있을 이야기를 드립니다. 2006년1월9일 월요일 부터.......>

 

ㅡ읽기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칸을 두었습니다. 단락과 무관합니다.ㅡ

 

-시작-



         이순의



<부님 자살을 하게 되면 정말로 지옥에 가나요?>
<왜요? 아시는 분이 세상을 버렸나요?>

<네. 너무나 아까운 친구가 절명을 했다고 하네요. 그 친구가 정말로 지옥으로 가야하나요?>

<제가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 또한 신께서만이 아시겠지요. 다음 세계를 살다가 오신 분이 존재치 않으니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까지 무한하신지는 저도 모릅니다.>


옥이 죽었다. 임경옥이 죽어버렸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경옥이 세상을 버린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촘촘히 정성을 다해 한 올 한 올 역어 만든 동그란 매듭거울이 걸려있다. 언제든지 드나들며 쉽게 볼 수 있도록 방문 옆에 걸어 놓았다. 그렇지만 거울을 들여다 볼 적마다 경옥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경옥을 의식하지도 않았지만 그 거울을 만들어 준 사람이 경옥이었다는 사실조차 새겨두지 않았다. 머리가 헝클어 졌는지 아니면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는지 만 보았을 뿐, 거울을 보고 있는 의식조차 무의식의 반복이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있지 않았다. 거울 속의 머리와 이빨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내 머리와 내 이빨만 살피느라고 경옥이 만들어 준 거울 속은 들여다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소를 하다가 말고 문득 손에 든 청소기의 소음이 싫어졌다. 날이면 날마다 시끄러운 기계 울음을 벗하여 밀고 당기는 일상이 싸늘한 외로움으로 되새김되었다. 당장 플러그를 뽑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무의식의 저편에서 외면당하고 있었던 거울이 짙은 얼룩을 잡고 시야에 들어왔다. 경옥이었다. 손길 한 번 주지 않은 무관심의 오물을 뒤집어쓴 채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스라쳐 일어났다. 얼른 화장실로 가서 벽걸이장의 투명 유리문을 열고 수건을 집어 들었다. 가슬가슬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촉감이 반가웠다.

 

거울을 닦기 시작했다. 호 입김불은 습기는 동그라미 유리에서 뽀드득뽀드득 이물질을 밀어냈다. 경옥의 얼굴이었다. 나 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맑고 투명한 경옥의 얼굴이 살아났다. 다행이었다. 거울은 변하지 않았고 투명했다. 그런데 둘러싼 매듭 장식이 때에 절어 잘 닦아지지 않았다. 털고 문질러도 실오라기 사이사이에 배긴 시간의 찌꺼기들이 좀처럼 털어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 경옥을 만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조차 희미했다. 무심한 세월을 거슬러 올라 촘촘히 더듬기 시작했다.

 

적어 둔 전화번호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그 자리에 적혀 있었다. 경옥의 낡은 숫자들이 흔적처럼 남아 그대로인 것을 보면서 오랫동안 수첩정리도 하지 않고 살아온 무디어진 내 자신의 일상이 따분해 졌다.

서툰 숫자를 읽으며 또박또박 전화기의 단추를 눌렀다. 통화중 신호음이라도 들린다면 기다렸다가 다시 단추를 눌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느라고 순간의 기운이 흐려졌다. 그때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발신음은 분명히 뚜 뚜 뚜가 아니었다. 깊이 잠든 소식을 깨우고 있었다. 굵고 투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임경옥씨 댁이지요?>

대꾸가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전화를 드려서 그러는데요. 혹시 전화번호가 바뀌었나요? 임경옥씨 댁 아닌가요?>

<어디세요?>

들려온 남성의 저음은 굳어 있었다.

다시 경옥의 집인지를 물었지만 그쪽에서는 계속해서 누구인지를 되묻고 있었다. 전화를 끊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경옥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네. 저는 전에 보육원에서 같이 살았는데요. 보육원에서 봉사할 적에 친했었는데.......>

 

차근하고도 가라앉은 음성으로 천천히 대답이 흘러나왔다.

<경옥이는 제 누이인데요. 지금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누이가 떠나 간지 삼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누이를 찾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직감으로도 슬픔이 전해지고 있었다. 경옥이 이승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예감이었다. 그게 벌써 삼년 전이라는.......

옥이 처음 보육원에 오던 날은 가을바람이 스산한 저녁나절이었다. 어찌나 어린냄새가 폴폴 나던지 아이가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온 것 같았다. 얼굴빛은 희고 살갗은 보드라운데 손목까지 가늘었다. 거친 장애 아이들의 신기에 가까운 근력을 당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슬쩍슬쩍 거동을 훔쳐보았지만 각오만큼은 단단히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경험의 시선들은 아직 여물지 않은 연약한 소녀의 티를 발견하고 있었다. 결심이 굳건하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봉사는 아니었다. 육신은 단단해야 하고, 정신은 강인해야 하며, 마음은 굳세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경옥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꺾일 듯이 가는 허리와 티 없이 맑아 보이는 눈동자와 비단결 보다 보드라운 수줍음을 가지고 온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동안에는 그런 경옥을 보지 못했다. 그녀를 볼 겨를이 없었다.

 

방안의 한쪽구석에 내 자리로 돌아와 숨을 돌리며 허리높이 서랍장 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지치지도 않고 보여주는 형광등의 수고를 차단했다. 등줄기에 흘렀던 땀이 식기 시작하고, 그 차가운 축축함이 싫어질 때쯤 양치 컵을 들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흥순이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귓속말로 신명스럽게 속삭였다.

<빨리 씻고 놀이실로 모이래.>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 소개될 것이고, 간단한 상견례가 마련될 것이며, 조촐한 오락시간이 허락될 것이었다.

 

방에서 나온 선생님들의 소란은 제법 넓은 놀이실을 흔들어 놓았다. 낮 시간 동안의 피로를 생각하면 웃음조차 기력을 잃었을 법 한데, 되러 밤에는 아이들처럼 신명을 더했다. 긴한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구석에 앉아 속삭이는가 하면, 연두색 고무공으로 간이 축구를 하느라고 엉켜버린 이들도 있었다. 웃음소리는 청명했고 육신은 건강했다. 아무도 지처보이지 않았다. 그들만의 짧은 자유 시간을 알차게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결코 길지 못했다.

놀이실 문에서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열리더니 원장님께서 경옥을 동행하고 들어왔다. 반듯한 검정색 정장차림에 그 시간까지도 작은 서류봉투를 들은 원장님 뒤로 경옥이 연한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따랐다. 아까 본 그대로였다. 그들의 모습은 비누냄새 위에 스킨냄새만 덧칠한 봉사자들과 달랐다.

 

원장님은 문에서 가까운 놀이실 의자 위에 좋은 풍채를 놓으셨다. 굳이 위엄을 부리지 않았어도 엄격해 보였다. 선생님들은 원장님 앞으로 자리를 잡으며 모여 앉았다. 서있는 사람은 경옥뿐이었다.

<오늘 새로 오신 선생님입니다. 이름은 임경옥이고....... 음~! 우리 아이들에게 새로운 도움이 되어 주실 수 있는 선생님입니다. 피아노를 전공하시고....... 아마 앞으로도 피아노 공부를 더 해야만 하는.....?>

원장님은 경옥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경옥은 가벼운 목례로 답을 하였다.

<아마도 우리 보육원에서 봉사도 하시고 공부도 계속해야하는가 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피아노를 잘 치는 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여러분들이 잘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임선생님, 한 말씀 하셔야지요?>

경옥이 다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임경옥입니다. 저 보다는 모두 언니들이시다고 들었습니다. 연주연습만 하다가 와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도와주시리라고 믿어요. 부탁합니다.>

 

얼른 살펴보아도 장애의 증상이 제 각각인 아이들의 보모 노릇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피아노 연주를 잘할 수 있는 봉사자를 얼마나 필요로 했던가? 모두들 바라는 마음이 같았고, 무엇보다도 날이 밝으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할 아이들 생각에 기쁨이 넘치는 박수를 쳤다. 원장님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번졌다. 그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던 의자를 경옥에게 권하더니 손을 들어 보이며 나갔다.

<너무 오래 시간을 끌지 않도록 합시다.>

<걱정 마세요. 원장님!>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합창을 하고 있었지만 편함에 대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잠든 방을 둘러보아야 했으므로 나는 원장님을 따라서 놀이실을 나왔다.

 

그런데 날이 밝은 아침부터 모두들 들떠 있었다. 투박한 아주머니 같은 선생님들과 달리 사분사분 곱고 여린 새 선생님이 오셨으므로 아이들이야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별로 큰 도움은 되어주지 못할 것 같은 어린 선생님을 맞은 기쁨이라고 보기에는 뭔지 모를 흥겨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표선생, 도대체 아이들처럼 왜들 이러는 거예요?>

선희는 특유의 차분한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곧게 세우며 돌아서서 방긋 웃었다.

<정말모르세요?>

<그래요. 나는 먼저 나왔잖아요?>

<아! 그랬지요?! 오늘 연주회 있잖아요. 피아노독주회!>

경옥이 회합시간에 피아노 연주를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신바람이 난 이유는 예쁜 피아노 선생님이 생겼다는 사실이었고, 어른들이 신바람이 난 이유는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반복은 잠자리를 준비하는 분주함에서 시작 되는 것 같았다.  주방에서 밥과 반찬이 오면 아이들 마다 다른 식사법에 맞춰 그릇그릇을 채워야 한다. 혼자 먹을 수 있거나 서로 도와 줄 수 있는 아이들은 짝을 지어 앉고, 거동이 불편한 아이들은 돌아가며 일일이 먹여줘야만 한다. 그 틈에서 쏟기도 하고 흐르기도 하고, 그렇지만 모여 앉은 식사시간만큼 다소곳한 때도 없을 것이다.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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