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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것이 끝난것 같은 적막함 속에서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1 조회수781 추천수6 반대(0) 신고

 

 

                                               <En Gedi 에서 바라본 사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이시다." (요한 1, 29)

 

 

얼마전 8일 피정 때 해주신 예수회 조현철 신부님의 강론 말씀입니다. 강론하신 것을 메모한 것이라 신부님의 강론 말씀을 충분히 살리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이시다." 라고 세례자 요한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세상의 죄스러움과 악이 왜 있느냐?" 

 

하느님이 완전히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는 것에 대해 데이빗 흄이라는 철학자가 의의를 제기했습니다. "악이 있는 것은 현실인데 하느님이 만약에 전능하시다면 악을 없앨수도 있는데, 전능하신대도 악이 있다면 전선하신 하느님이 아니다. 두번째로 하느님이 착해서 악이 있는데 악을 없애지 못한다면 하느님은 전능하시지 않다." 라고 자신의 논리를 폈습니다.

 

악이 왜 있느냐? 사실 고민입니다. 어느 한 쪽이면 좋은데... 근본적인 뿌리로 들어가면 악도 신비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처음부터 악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상을 보는데 있어서 그 전능하심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삶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 은 속죄제물의 표현의 양식으로 어린 양은 힘이 없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강제로 해서 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희생이 되어 악을 없애십니다. 어린양이 어떻게 힘이 있습니까? 죄를 막강한 힘으로 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들이마시는, 죄에 희생당하는 것으로 보이나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끝난것 같은 적막함 속에서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과 사회에서 따돌림당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완전히 패배한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억압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 그 무엇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악을 없애시는 방법입니다.

 

왜 악을 들이 마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그것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가 죽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여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말을 했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악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강요를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강제력을 행사하시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피해를 받는 사람에게 가서 같이 고통을 당하십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사랑 때문에 무력합니다. 역설적으로 무력함에서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힘이 나오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갓난 아기의 무력함으로, 십자가의 수난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사랑 때문에 무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엄청난 힘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의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자기 삶안에서 각자가 기도를 통해, 의식성찰을 통해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예수님의 뜻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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