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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무 쉬워도 탈?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3 조회수685 추천수8 반대(0) 신고



복음: 마르 2,1-12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차 있던 집.
지붕이 벗겨내지고 천정 위에서
침상 하나가 공중곡예를 하듯 내려온다.

이스라엘의 옛집들은 둥근 움집 처럼 생겼는데
가운데로 올라갈수록 천정이 좁아져 맨 꼭대기에는
가로지른 몇 개의 막대에 풀을 얹어놓았다.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다.
집 밖으로는 지붕을 보수하고 갈기 위해
천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설치해놓은 것이 보통이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그 사다리를 통해서 천정으로 올라가
풀 지붕을 벗겨내고 몸이 아픈 친구를 내려보낼 수 있었다.

기상천외한 비상조치를 생각해낸 과감한 행동의 배경은
예수님이야말로 친구를 낫게 하시리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잘못하면 죄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확언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엔 누구나 죄 때문에 병에 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의도적이었다.
거기에 있던 율법학자들의 반감을 일부러 유도하시는 말씀이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죄는 하느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던 그 믿음에
이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해주시려는 것이다.

그 자리가 본래 병자 치유의 자리가 아니라
'복음 말씀을 전하던' 자리였음을
맨 처음 도입부에서 눈여겨보았는가?
그렇다면 이 치유기적은 어떤 가르침을 위한 부제(副題)인 셈이다.
즉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권한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까지 넓혀진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한을 제자들에게까지 주시기 때문이다.
'신성모독'으로 고발될 만큼의 폭탄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당장 신성모독죄로 잡아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병석에 꼼짝없이 누워있던 중풍 병자가
갑자기 일어나 누워있던 들것까지 들고 걸어나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누워있어 일어난다고 해도 근력이 없어야 할 환자가
자기의 침상까지 들고 갈 수 있다는 놀라운 외적 표지 앞에서는
모두들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죄를 사했다는 말은 증명이 어려운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 치유는 외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에 증명이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내적인 치유인 죄의 용서의 증거로써
외적인 치유인 병 치유를 내보이신 것이다.

현대 독자인 우리들도 이 대목에서
중풍 병자의 치유는 놀랍다고 인정하지만
죄의 사함은 그렇게 놀라운 기적으로 보지 않는다.

말을 바꾸면
중풍 병자의 치유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죄의 사함은 그렇게 어렵다고 보질 않는다는 것이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복음서에는 답변이 주어지질 않는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이 답변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죄의 용서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자.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했으나
그들에게도 '사람'이 대신 죄를 사해 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일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대사제만이 죄를 사할 수 있었다.

대사제는 먼저 자신의 죄부터 씻기 위해
복잡한 예식을 치르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제사를 올리고 피뿌리는 예식을 통해 죄를 사했다.
또한 백성들도 예물, 단식, 기도, 자선 등을 수행해야 했다.

육신의 치유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눈에 보여지지 않는 죄의 용서라는 내적치유는 증명이 어렵기에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절차와 과정없이
한 말씀으로 죄를 사한다는 것이 믿어지겠는가?
이것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효과에 대한 의심을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도, 타 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의
고해성사의 의문점이 바로 그것 아닌가?

예수께서는 그렇게 어려운 죄사함을
그렇게 쉽사리 해주신다는 것이 아닌가?

신영세자들이 엊그제 첫 고해를 했다.
가장 어려운 것이 그것이라고 여러번 걱정들을 했다.
어디 신영세자들 뿐이랴?
고해성사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신자들이 꽤 많다.

아무래도 옛 구약의 의식으로 돌아가
피를 한 바가지씩 뒤집어쓰는 것이 쉬우려나보다.
너무 쉬워도 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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