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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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잡을 끈이 없구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4 조회수79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6.1.14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사무 상9,1-4.17-18. 10.1a 마르2,13-17

                                                      



“잡을 끈이 없구나!”



하느님의 부르심은 신비입니다.
부단히 찾고 물어야 하는 부르심의 신비입니다.

“왜, 하느님은 무엇을 하라고 나를 부르셨는가?
내 사명은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와 존재 이유, 정체성과 직결되는 물음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님과 상담 중,
탄식처럼 튀어나온 저의 말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잡을 끈이 없구나!”
그분의 며느리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데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신자라는 사실이 잡을 끈인 데...
그리고 세례명을 부르면 잡아끌어 올릴 수 있는데...’
신자가 아니니 참 난감했습니다.

잡아끌어 올릴 수 있는 세례명이 있다는 것,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바로 하느님 은총으로 불림 받은 존재임을 상징하는 세례명입니다.

가끔 그리운 수도자들이나 신자들을 만났을 때,
세례명이 생각 안나는 경우의 낭패감 잊지 못합니다.

반대로 세례명을 기억해 불렀을 때 기뻐하는 모습들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마 존경하는 분이 나의 세례명을 잊지 않고 다정히 불러줬을 때의 기쁨, 이 또한 간접적 구원 체험일 겁니다.

바로 여기서 부르심이 구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 사랑 받고 인정받는 존재로서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또 이렇게 부름 받았다는 자각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성소의 진면목이 오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사람이다(사무 상9,17).”

사무엘을 통해 다짜고짜 사울을 잡아내셔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런 사울이었는데 그의 말년과 최후는 어떠했는지요?
하느님께 버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마친 사울이 아닙니까?

부르심 받았다는 게 보장이 되지 못하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끝까지 내 스스로 소중히 돌보고 가꾸어 가야할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또 복음에서도 주님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자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2,14).”
주님 마음에 들어, 주님 필요하여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생각과 하느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 눈에 잘나고 똑똑해서 부르신 게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들어, 하느님 좋아서 부르신 것입니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 는 불가의 속담도 있듯이
사람 눈에 약하고 부족해 보이는 수도자들이 수도원을 지킵니다.

이래서 부르심은 은총의 신비라 합니다.
이런 자각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사와 겸손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은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새삼 수평적 관계의 공동체와 더불어
‘하느님과 나’와의 수직적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순전히

수평적 인간의 눈으로 주님을 판단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로 주님의 이 말씀이 성소의 비밀을 보여 줍니다.
사람 눈에 잘나고 똑똑한 이들이 아니라,
진정 당신을 믿고 바라는

부족한 죄인들을 불러 당신의 도구로 쓰시는 주님입니다.

매일 미사 은총을 통해 깨닫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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