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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39)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31쪽 부터 35쪽까지)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5 조회수718 추천수3 반대(0) 신고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31쪽 부터 35쪽까지)

                                                     이순의

 

 

<문장의 기술은 부족할지라도 쓰기는 열심히 썼으며 이 시대의 누군가는 살고 있을 이야기를 제 부족한 솜씨로 완성해 보았습니다. 묵상글은 아니구요. 순수창작 소설입니다. 그 안에서 묵상할 것이 있다면 안으시고 묵상할 것이 없다면 그저 지어낸 이야기 한 토막의 재미를 즐기시라고 알려드립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마련한 것이므로 사랑하는 벗님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굿뉴스의 벗님들께 이 시대의 누군가 살고 있을 이야기를 드립니다. 2006년1월9일 월요일 부터.......>

 

ㅡ읽기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칸을 두었습니다. 단락과 무관합니다.ㅡ

 

-계속-



         이순의

 

 

그래도 지금은 체념이라는 달관의 도를 어느 정도는 넘은 듯하였다. 자신이 사는 방식에서 얻어지는 이윤이라는 현실에 체념하게 되고, 주변에 머무는 존재들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각자가 살아가는 위치에서 겪어내야만 하는 운명은 달관해야만 했다.

그런 흥순을 바라보는 사람보다  흥순 자신이 그 자본이라는 현실과 이성이라는 엄위 사이에서 갈등의 기복을 감당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연히 곁에서 머무는 사람까지 그토록 부자연스러운 매음의 향기를 풍겨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껄끄러운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토록 활달하던 흥순의 모습은 숙어들었고 매사에 위태위태하고 허허한 사람으로 바뀌어갔다.

 

분명히 냄새는 났다. 속곳이 펄렁거린다는 냄새가 나기는 났다. 그래도 결코 천박한 싸구려 속곳 냄새는 아니었다. 상품일수는 있으나 죄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짐작으로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을 만큼의 틈새는 허락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곳에 부름 받는 최고의 상품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얼굴 생김은 미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교양 있지. 심성 곱지. 정신 건강하지. 나무랄 데가 없는 흥순이 선택한 직업이라고 자위하고 싶었다.

 

동안은 흥순으로 부터 소식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여겼다. 서로가 사노라고 바빴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서로에게 소강상태를 유도하고 싶었다면 어느 쪽에서건 기별을 넣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우정을 격어 온 처지에서 가끔은 함께 밀접한 내면의 의존도가 식상할 때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잊어지지도 않았다. 못 보아서 그리운 것도 없었고 안 보아서 시원할 것도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흥순이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친구도 아니었고 있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요긴한 친구는 더욱 아니었다. 그대로 물처럼 공기처럼 무덤덤하게 무색무취 무조건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저 서로의 굴곡진 모습을 인정해 줄 뿐, 그 인생이라는 중대한 여정의 갈림길에서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훈수하지 않았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길을 서로가 서로에게 아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말자고 약속한 적도 없었지만 그냥 그대로 바라봐 주는 인정이었다.

 

름의 녹음이 한창일 때 흥순으로 부터 다시 전화호출 령이 당도하였다. 야간외출에 과도한 기피증이 있는 나에게 컴컴한 밤 외출을 요구한 것이다.

<언니가 와서 나 좀 데려가라. 지금 언니가 오지 않으면 나 안 되거든. 언니한테는 절대로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그래서 꼭 언니여야만 되기도 하구. 언니, 꼭 올 거지? 기다릴게요.>

음성으로 보아 상당한 취기가 전달되었다.

긴 세월을 더듬어 보아도 주사를 동원하면서까지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또한 흥순이라는 친구의 성품을 세세히 곱씹어보아도 저럴 사람은 아니었다. 다급해진 한여름 밤의 외출은 딱히 골라 입을 옷도 마땅치가 않았다. 급하게 지갑하나 달랑 들고 대로변에 섰다. 아스팔트의 여름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어둔 바람과 섞여 있었다. 손을 들기도 전에 택시 한 대가 미끄러져 내 앞에 섰다.

낮에 본 포장마차가 밤의 포장마차는 아니었다. 포장에 꽁꽁 묶여 숲 울타리 가장자리에 숨어 몇 날씩 혹은 몇 달씩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거나 영업의 손실로 방치된 폐차일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불야성의 밤거리를 휘청거리게 하는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었다.

 

세상에 태어나 밤거리의 포장마차에 내 발로 걸어들어 가는 인상 깊은 밤이었다. 숲에는 사이사이에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고, 취중의 손님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잡담에 풀어져 있었다. 흥순을 찾아 낯 설은 풍경사이로 둘레둘레 살피고 다닌다는 것도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야심한 밤에 여염의 아낙이 흥청거리는 포차들 사이를 헤맨다는 것이 결코 옳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야간의 호출을 요청한 적이 없는 흥순의 취기가 예사롭지 않게 불길했다. 한 그루의 나무주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탁자들이 방향을 달리하며 얽혀있었다.

 

제법 키 작은 나무들이 잔풀들처럼 울타리 삼아 둘러진 한적한 곳에 흥순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밤에 중후해 보이는 검은색 정장차림의 신사가 둘이었다. 외간의 사내와 얼굴마주 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흥순이 야간의 포차로 나를 불러내서 동석을 시키는 의도에 마음이 상했다. 등을 보인 흥순보다 사내들이 어리벙벙한 자세로 주춤주춤 일어났다. 취중에 고개를 숙여 앉은 흥순이 얼굴을 들어 돌아보았다.

<엉? 언니 왔어?>

걱정과 달리 흥순은 웃고 있었다.

<제 말이 맞지요?! 우리 언니는 집에서 입던 그대로 달려올 사람이라고 했지요? 우리 언니는 화장할 시간도 없이 아우를 돌보러 올 거라고 했지요? 이 언니가 나의 골동품 친구예요. 인사들 하세요.>

흥순은 부자연스러운 분위기와 상관없이 사내들에게 인사를 권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엄 여사님께서 어찌나 자랑을 하시던지 저희가 결례를 무릅쓰고 기다린 것입니다. 오셨으니 일단 앉으시지요?>

사내들의 정중함이 경망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언니 앉아. 이분들은 곧 가실거야. 내가 오늘 좀 취해서 여기까지 데려다 주신 것뿐이야. 나 혼자 두고 가실 수 없다고 하셔서 언니 이야기를 약간 해드렸어. 괜찮아. 우리 골동품! 앉아도 되네요. 누가 보물단지 아니랄까봐.......>

취중인 흥순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앉았다.

흥순은 사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노련한 손놀림으로 술을 따랐고 그들은 한 숨에 마셨다.

<술을 안 하신다고 하시니 저희가 권해 드릴 수가 없네요. 두 분께서 좋은 시간 가지십시오. 저희들의 책임은 여기서 끝입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사내들은 간단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답례는 내 차례였다.

<제 친구를 여기까지 동행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밤이 깊었는데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사내들은 정중한 몸짓으로 앉았던 자리의 흔적들을 가지고 갔다.

 

사내들을 배웅하고 노천의 탁자에 앉기도 전에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생글생글 웃어 보이던 흥순이 참았던 울음보라도 터져버린 듯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먹거리며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나의 허리춤을 부둥켜안고 폭포수를 쏟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는 섣부른 위로를 줄 수도 안 줄 수도 없었다. 그저 한참을 서서 무게에 짓눌린 허리를 고정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밤의 진땀이 흘렀다. 통곡소리 퍼지지 않는 통곡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 울어. 울려고 나를 불러냈을 것이야.>

흐느낌은 오래였고 침묵은 지루했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어? 말을 해봐.>

그래도 흥순의 절박한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여름밤의 도시 하늘에는 별도 드물었다.

장대비를 마련하시는지 끈적거림은 드세었고, 취한 군중의 얼굴은 번들거렸으며, 안주 타는 냄새는 역겨웠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야심한 밤에 아녀자 둘이서 어디로 가야 마음 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일어나. 여기서 나가자.>

그때서야 흥순이 내 허리춤에 가하고 있던 무거운 중량을 해제시켜주었다.

부축하려 했더니 거부했다. 흥순은 술에 취한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 걸을 수도 있었고 의식도 또릿했으며 자세도 바르고 곧았다. 지갑을 열며 계산대 앞으로 나서는 나의 손을 가로 막았다.

<얼마예요?>

흐트러짐 한 점 없는 소리가 흥순의 입에서 짧게 튀어 나왔다.

<먼저가신 손님들께서 계산을 끝내셨습니다.>

<그렇군요.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십시오.>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나올 때는 그렇게 여러 개의 탁자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계산할 것도 없이 서 있는 곳은 어두운 밤거리였다. 무슨 말이든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아니 그대로 헤어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내 생각인데 밤이 깊어서 찻집에 가 보아야 소란스러울 것이고, 근처 모텔에라도 들어가 에어컨 바람이라도 틀어놓고 이야기 좀 하지?>

흥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따라서 걷는 수밖에 없었다.

 

밤의 숲에는 어린 청소년들의 과도한 애정행각들이 종종 목격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한 없이 위험한 슬픔이었고, 다르게 생각하면 멋모르고 즐거운 경험일 것 같기도 하였다. 내 아이일 수도 흥순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해 보며 지금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언니, 우리 모텔로 가자.>

자아의 두려움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침묵을 깬 사람은 흥순이었다.

<그래! 그게 좋겠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텔이라는 장소가 편리하게 쓰일 때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막연히 부정한 사람들의 행각을 묵과해 주는 비행의 장소로만 인식했던 어린 의식과는 달랐다. 간혹 친구들과 모여 수다 떨며 뒹굴고 싶을 때는 모텔이 편했다. 그런데 벌이를 위해 드나들었을 흥순에게 편안함을 제공하려고 모텔이 정해진 것이다.

 

모텔에 들어섰을 때도 흥순은 온돌바닥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어떻게 지켜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텔레비전을 켤 수도 없었다. 씻겠다고 화장실에 들어앉을 수도 없었다. 수건만 가져다가 얼굴 밑에 깔아주었을 뿐, 벽에 기대어 천정만 처다 보았다.

한동안 만나자는 기별이 없었던 흥순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저렇게 서러운 사단이 벌어질만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남편이 죽었다면 기별조차 안 할 일은 아니었고, 아이들이 사고를 쳤다면 그 소중한 영역의 자존심을 나에게 펼쳐 보일 위인은 절대로 아니었다.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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