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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39)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36쪽 부터 40쪽까지)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6 조회수815 추천수2 반대(0) 신고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36쪽 부터 40쪽까지)

                                                     이순의

 

 

<문장의 기술은 부족할지라도 쓰기는 열심히 썼으며 이 시대의 누군가는 살고 있을 이야기를 제 부족한 솜씨로 완성해 보았습니다. 묵상글은 아니구요. 순수창작 소설입니다. 그 안에서 묵상할 것이 있다면 안으시고 묵상할 것이 없다면 그저 지어낸 이야기 한 토막의 재미를 즐기시라고 알려드립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마련한 것이므로 사랑하는 벗님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굿뉴스의 벗님들께 이 시대의 누군가 살고 있을 이야기를 드립니다. 2006년1월9일 월요일 부터.......>

 

ㅡ읽기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칸을 두었습니다. 단락과 무관합니다.ㅡ

 

-계속-



         이순의

 

 

그래도 포장마차 보다는 몸도 마음도 편했다.

울을 사람은 울라하고, 나는 나대로 다리를 펴고 앉을 수 있어서 편하기도 했지만 야간의 포장마차에서 나를 알아볼 것 같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더욱 안정적이었다. 흥순의 울음소리도 포장마차에서처럼 흐느낌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제법 큰 곡소리가 섞여 불규칙하게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졸음이 의식을 희미하게 몰아넣고 있을 때 흥순은 고개도 들지 않고 그렇게 엎드린 채로 말을 꺼냈다.

 

<언니, 나 선희언니 만났다.>

<......?>

그 청력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선희언니 만났다니까.>

흥순은 퉁퉁 부어 오른 얼굴을 들어 보이며 돌아앉았다. 눈 아래로 수건에 스친 광대뼈의 살결이 빨갛게 벗겨질 지경이었다.

<선희언니?>

<그래. 우리 보육원에서 살을 때 예쁜 언니 있었잖아?! 표선희라고 생각 안나?>

너무나 긴 시간들의 과거를 떠올려야만 하는 소식이었다.

 

희는 워낙에 조용한 성격이라서 늘 있는 둥 마는 둥하였지만 그 출중한 미모 때문에 앉은 자리에서는 항상 빛이 났다. 선희와 특별하게 친한 선생님도 없었지만 유별나게 불편한 선생님도 없었다. 공동체 운영에 관한 모임에는 꼭꼭 동반의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개인적 친분의 자리에는 한 번도 눈에 띤 적이 없었다. 선희네 방 아이들을 잘 돌보는 이상의 다른 사적인 교류를 엮으며 친분을 쌓는 성향은 아니었다.

 

선희는 명문가로 시집을 간다는 이유로 보육원을 그만 두었었다. 그 후로 선희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결혼식마저도 보육원 식구들의 참석을 거절한 터였으므로 대부분의 보육원 식구들은 선희를 쉽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선희를 흥순이 어떻게 만났다는 말인가?

<그래 생각나! 그런데 선희언니를 만났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울어?>

흥순은 서러운 울음 속에 다시 묻혀 버렸다. 기억에서 조차 멀어진 선희를 만났다면 반가웠을 텐데 도대체 무엇이 흥순을 저토록 서럽게 하였더란 말인가? 흥순도 지치고 있었다. 더는 방치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이든 하게 하거나 들려 줘야할 것 같았다.

 

<왜? 선희언니는 재벌 수준이라던데 좋아 보여?>

<그 언니야 좋아만 보이겠어? 우리네 사는 거랑은 방식부터 다르지.>

<사람 사는 게 다 같아. 그 언니라고 남들이 모르는 애환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그래! 그 언니도 애환이 있었어. 그런데 우리네랑은 다른 애환이었어.>

흥순의 마음도 진정이 되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말해봐.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언니. 나를 죽여줄래? 언니가 나를 죽여주라. 나는 미친년이야.>

내 자신이 지치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그런데도 흥순의 고뇌를 기다려야만 한다는 사실이 지겹기까지 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라도 기다려줘야 한다는 게 또 싫증이 났다. 사람의 감정이 무기력해지고 기다림의 의미가 상실되면 상대의 표정에서 느끼는 싸늘함은 소름끼치게 되어있었다. 비로소 흥순도 지친 나에게서 한계를 읽었을 것이다.

 

<언니가 상상도 못할 일이 있었어. 절대로 놀라면 안 된다? 언니한테 이해해 달라고는 안할게. 그러나 도저히 나 혼자는 감당이 되지 않아서 언니를 만나자고 한 거야.>

그러고 보니 선견이라도 되는 게 있었다.

<선희 언니 남편하고 불륜이라도 저지른 거야?>

<아니야.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선희언니 남편이었다면 울어야할 이유도 비참해질 이유도 없지. 당연히 받아야할......>

<그럼 설마? 선희언니가 엄선생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설마? 그 명문이라는 데서 쫓겨난 것은 아니겠지?>

엉겁결에 보육원에서 부르던 호칭이 급하게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아니야 언니. 흥분하지 말아요. 진정하시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봐요.>

 

너무나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운명의 장난도 너무나 추접한 운명의 장난이 얽혀져있을 것 같았다. 자세한 내막은 듣지도 않았는데 흥순이 미워졌다. 겨우 그런 인간일 것이었는데 그 시간까지 기다려주고 바라봐주고 걱정해주었다는 게 한 없이 한 없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흥순에게서 더러운 시궁창 냄새가 났다. 구역질이 나고 역겨웠다. 여관방의 페트병에 담겨있는 물이라도 끼얹어 씻어주고 싶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밀려오는 분노를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언니가 들으면 용서가 되지 않을 거야. 그래도 언니가 들어 주어야해. 내가 그 돈을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걸?>

감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무슨 돈? 선희언니가 요구하는 거 들어주는 조건으로 위자료 뜯었어? 그렇게까지 해서 돈벌이 하는 엄선생은 아니었잖아?>

<어이구. 우리언니를 이렇게까지 전문가로 만든 죄인은 입이 천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제발 진정하세요. 언니.>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버린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고 담담하게 인정해야만 하는 시대에 속해 있었다.

<선희언니가 나타나서 돈을 주었어. 작은 돈도 아니고 아주 큰돈으로.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 언니는 곱고 예뻤어. 그런데 전혀 반가운 기색도 없었고, 그렇다고 경계하는 그런 눈빛도 아니었어. 아주 간단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이었어. 그 돈 받고 만나지 말라더군.>

<선희언니 남편도 아니라면서 도대체 누구를 만나지 말라는 거야? 자세히 좀 말을 해봐.>

 

순이 소개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이 있었다.

나이도 흥순 보다는 덜해 보이는 신사였고 아내가 있을만하였는데도 필요할 때는 종종 불러 주었다. 연배가 중년에 근접한 사람들의 관계란 가정이 있게 마련이었고, 사회적 직위나 신분에 따라서 뒤가 깨끗해야만 했다. 상대 쪽에서 자신의 거취를 밝혀오지 않으면 굳이 그것을 알아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마찬가지로 흥순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그런 부분에 대하여 늘 고심하였고 연속된 인연은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아름과 풍문으로 그 사람들의 신상에 관하여 접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선희가 불쑥 흥순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검정색 바지정장차림의 단정함이 질리도록 사람이 차게 보였다. 머리핀에서부터 옷은 물론 스타킹과 구두 그리고 핸드백까지 검정색이었다. 오히려 얼굴과 손의 살결이 대조를 이루었다.

<언니는 여전히 고우시네요. 정갈해 보이시구요!>

<응! 엄선생이 이런 일을 하는지는 몰랐어요. 거두절미하고! 골프모임에 동행했던 분 알지요? 이만하면 엄선생이 하는 일에 충분한 보수는 되리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 만나지 말아주세요.>

 

흥순은 선희의 고상한 품위와 절제된 표정 앞에서 현기증이 엄습하였다.

<아니 언니! 그분이 남편이셨어요? 언니,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잠시 파트너가 필요하시다고 하셔서 공 몇 번 쳐드린 것뿐이에요. 이러시지 마세요.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러시면 안 되지요. 언니?>

<부탁해요. 그리고 우린 만난 적도 없는 거예요. 이런 일 오래 하신 것 같아 보이는데 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시지요?>

 

그리고 흥순의 변명이나 대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노는 물에 대하여 빤하게 아는 눈치였고, 흥순의 말 따위는 들을 필요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듯이 매몰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란의 소용돌이에 말려버린 사람은 흥순이었다. 세상이 좁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선희 남편의 도우미를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라도, 상상이라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인연으로라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미 가정생활의 커다란 부분에서 필요 불가결한 자본의 영역이 되어버린 자신의 직업에 대하여 묻어 둔 앙금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처음 시작의 관문이었을 뿐, 그 문의 빗장을 부숴버리고 정당화해서 합리적으로 살은 지가 오래였다. 사회가 주는 자본의 질서란 다 그렇고 그렇게 일구고 가꾸며 사는 것이었고, 나라고 해서 못할 법도 없는 것이고, 사람이 사는 기술일 뿐이었다. 몰라서 못하는 일이었다. 몰라서 궁색하였고, 몰라서 초라했으며, 몰라서 어두웠다. 알았다면 넉넉하였고, 알았다면 화려하였고, 알았다면 밝았을, 그런 별천지의 흥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세월을 재미나게 잘 살았다.

 

돈에 속고 돈에 살고 돈에 재미난! 굳이 영적인 부분의 심연을 건드려 혼란을 자초할 이유도 없었다. 산다는 것은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초침이 쉬지 않고 째깍거리는 것이며, 산다는 것은 비가 오시나 눈이 오시나 해님이 쨍쨍 뜨게 되어있는 것이고, 산다는 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루 삼시 세 때를 배가 부르든지 말든지 늙게 되어있는 것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라고 하지 않았던가?! 언제까지 젊음이 유지될지 모를 일이었고 벌어들일 수 있는 만큼 벌어들인다는 것은 곧 세상에 살아있는 최후의 날까지 보장해줄 수단이었다.

 

숨 가쁘게 살아왔다.

그런데 흥순 앞에는 타락한 창녀의 화대가 놓여 있었다.

일을 해서 벌어들인다는 지금까지 개념의 그 어떤 돈 보다 모욕적이었다. 겨우 이런 것이었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곱고 정결한 선희의 꼿꼿한 얼굴만 두려울 뿐이었다. 돌려주려고 집어 들든지, 가지려고 집어 들든지, 그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이 있는 대지 위에 선다는 자체가 창피한 금전이 놓여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의식의 본능은 흥순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손에는 봉투를 집어 들었고 한 손에는 핸드백이 쥐어졌다. 풍경 좋은 교외의 조용한 찻집 마당에서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다급하게 현관문을 밀치며 뛰어 나갔고 촉감 좋은 에어컨의 냉기는 뜨거운 복사열에 밀려 후진 당하였다. 흥순은 선희가 앉은 뒷좌석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차는 흥순의 손을 외면하였다. 마치 스케이트 날을 거부하는 빙판처럼 미끄러져 갔다.

선희를 만난 흔적이 얼마나 차고 얼마나 싸늘한지 그 냉동화상의 상처가 흥순의 가슴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대로는 아니었다. 이대로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지 선희를 찾아서 모멸에 젖은 그 돈을 돌려주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남편과의 관계가 깨끗이 청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선희라는 한 여인을 수소문하면 할수록 양파껍질 속의 유리 상자 같았다. 그 남편이라는 사람도 모임에서조차 소개받을 수가 없었다. 같은 하늘아래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굴러다니는 돌멩이 줍듯이 찾을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심해저의 조가비에 박힌 한 알의 진주를 찾는 것보다 어려웠다. 다만 송두리째 잃어버린 퍼즐의 조각 하나가 우연히 발견되는 것처럼 선희의 소식도 발견되었다.

그 남자가 선희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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