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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39)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41쪽 부터 45쪽까지)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7 조회수553 추천수4 반대(0) 신고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41쪽 부터 45쪽까지)

                                                     이순의

 

 

<문장의 기술은 부족할지라도 쓰기는 열심히 썼으며 이 시대의 누군가는 살고 있을 이야기를 제 부족한 솜씨로 완성해 보았습니다. 묵상글은 아니구요. 순수창작 소설입니다. 그 안에서 묵상할 것이 있다면 안으시고 묵상할 것이 없다면 그저 지어낸 이야기 한 토막의 재미를 즐기시라고 알려드립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마련한 것이므로 사랑하는 벗님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굿뉴스의 벗님들께 이 시대의 누군가 살고 있을 이야기를 드립니다. 2006년1월9일 월요일 부터.......>

 

ㅡ읽기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칸을 두었습니다. 단락과 무관합니다.ㅡ

 

-계속-



         이순의

 

 

흥순으로서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 남자가 선희의 남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이혼한 이혼녀는 더욱 아니라하고,  그렇다면 놓고 간 그 돈에 대하여 모욕감을 벗으려 하거나 모멸의 국물을 마셔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때서야 선희가 남기고 간 말이 떠올랐다.

<부탁해요. 그리고 우린 만난 적도 없는 거예요. 이런 일 오래 하신 것 같아 보이는데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흥순은 선희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그 말을 씹으면 씹을수록 선희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되새김질 되었다.

<아니? 그래서 선희 언니 소식은 더 이상 모르는 거야? 그래도 우리가 보육원에서 같이 살던 정이 있는데 그렇게 눈앞에서 매몰찰 수가 있었던 거야? 아이들은 몇 인지? 결혼생활은 행복한지? 그동안 아픈 데는 없었는지? 그런 안부정도는 서로 물었어야 되지 않아?>

 

나는 흥순이 쏟아놓는 이야기들을 차단하고 말았다. 모텔 방에서 듣는 선희의 소식이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흥순도 마른입술에 물을 적시느라고 잠시 주춤거렸다.

<아니야 언니, 그렇게 끝나지 않았어. 그 남자가 나를 찾아주었어.>

<그렇다면 그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는 게 사실이었어?>

<응! 언니. 그 남자는 남편도 모르는 선희 언니의 애인이었어. 아니 남편도 아는 애인이라고 해야 맞나? 그렇잖아?! 그런 사람들은 명문이라는 간판 때문에 서로 다른 살림을 살면서도 부부 유지는 해야 하는 사람들 있잖아? 아무튼 그 남자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만났지!>

<선희 언니가 엄 선생한테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못 만나게  할 만큼 그 남자가 비싸보였어?>

 

냥 손님으로 만나서 놀다가 스쳐버릴 상대로 무심히 보았을 때와는 달랐다. 깔끔했고 매너 좋았고 뒤탈까지 없으면 얼마든지 지속되어질 관계였던 그런 타산적인 관심으로 만날 수는 없었다. 선희의 남자였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선희 보다는 나이도 덜 되어 보였고, 인품 또한 그렇게 올곧은 성품의 소지자는 아니었다. 상당히 음흉한 구석이 엿보였다. 가정을 꾸렸는지 아니면 독신인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그 남자의 무엇이 선희를 붙잡고 있는지, 아니면 선희의 무엇이 그 남자를 붙잡고 있는지, 아무리 살펴보아도 흥순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았고 도무지 두 사람은 섞여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 만큼이 경계선인지를 분간하지 못했다. 흥순과 선희의 관계가 어떻게 밀접한지 조차  예측할 수가 없었다.

<누님을 만나셨다고 들었는데......?>

<네.>

 

흥순이라고 해서 선희가 어디까지 말을 했을지 그 경계선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흥순의 입장에서는 과거 어떤 경우라도 선희 언니의  사생활을 노출시킬 수 없다는 막연한 우정이 존속되고 있었다.

<누님을 아시게 된지는 오래된 것 같은데......?>

<네. 오래되었습니다.>

<누님께서 화가 많이 나셔서 어떻게 풀어 드려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까지 역정을 내신 경우가 없으신 분이라서......>

<그러시겠지요.>

<솔직히 두 분 사이가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엄 여사님께서는 누님의 역정을 푸실 방법을 알고 계실까 해서 뵙자고 한 것인데......>

<.......>

 

오히려 선희와 그 남자의 사이가 더 궁금한 쪽은 흥순이었다. 그렇다고 그 남자를 믿고 아무런 말이나 무턱대고 대꾸해 줄 수는 없었다.

<누님께서 직접 지불하셨다 던데.......>

돈의 지불에 대하여 곤두선 눈치였다.

그 남자가 흥순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미궁의 토막처럼 혼잣말을 띄엄띄엄하고 있었다.

<누님께서 직접 지불한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한데.......>

<........>

<누님께서 하신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액수가 작지는 않았을 텐데.......>

<만나지 말아달라는 말씀 외에는 하신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 누님이 사람을 섭섭하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흥순은 말의 실마리를 능동적으로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두 분이 절친한 사이인가요? 서로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분명히 누님께서 달리 하신 말씀이 있으셨을 텐데......?>

<누님을 사랑하시나요?>

동문서답의 목적이 서로 달랐으므로 흥순은 좀 더 원초적인 본론에 돌입하기로 작정을 했다.

<누님을 사랑하시는지요?> 

<사랑이요?>

<여자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씨앗이 개입이 되지 않고서는 그분이 저를 찾으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지 않았나요? 그에 반해서 나타나는 반응들은 강도가 너무 세서요. 사랑이시죠?>

 

나는 모텔 방에서의 짧은 여름밤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아슬아슬한 장면의 영화를 보는 것보다 감정의 개입이 강화되었고 가슴 떨림이 심화되었다.

<그 남자가 사랑이라고 했어? 선희언니를 사랑한데? 내가 볼 때는 사기꾼 같은데? 돈은 왜 자꾸 묻는 거야? 그거 달라고 한 적은 없었어? 요지경 속이 따로 없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는 들어 봤지만 이렇게까지 요지경 속인 줄은 미처 몰랐네.>

흥순은 다시 울먹이는 척 하더니 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고는 하던 말을 이었다.

<맞아 언니. 세상은 요지경 속이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고, 인연은 운명의 장난이었어.>

사내는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 우연히 들린 헬스클럽에서 미모의 선희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첫 순간 한 눈에 반해버린 여자였다. 그가 기혼이건 미혼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었다. 여자 하나를 차지할 만큼의 자신감은 있었다. 오히려 저렇게 예쁜 여인에게 기혼이라는 말은 반역이라고 확신했다. 도도한 자존심과 수줍은 눈빛은 순결한 처녀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사내에게는 인생의 의미가 오직 하나의 소유뿐이었다. 헬스클럽에서 여인을 기다리는 시간보다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은 눈인사 이외의 어떤 사교도 허락하지 않았다. 가끔은 음료를 권해 보기도 하고, 기구 사용법에 대하여 넌지시 도움을 청해 보기도 하였지만 허사였다. 음료는 마셨다했고, 기구 사용은 전문 트레이너를 불러 세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동행하는 남자가 있지도 않았고 말벗이라도 될 만한 동성의 친구와 함께 한 적도 없었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정해진 만큼의 운동량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다. 사내의 목적은 막연해졌고 의욕은 좌절되었다. 일을 한다는 것도 공부를 계속한다는 것도 미래에 대한 꿈을 설계한다는 것도 여자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가 꼭 저 여자여야만 했던 것이다.

정기적으로 클럽에 오는 사람들조차 수군거렸다. 간혹은 해바라기 운동이라고 농담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꼭 알고 있어야할 오직 한 사람만 모르고 있었다. 몰라서 모르는지? 아니면 알아도 모르는 체 하는 것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내의 심성은 나약해져갔고 너울 같은 여인의 자취를 따라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헬스클럽의 트레이너가 제법 큰 봉투 하나를 전해 주었다.

<공들인 보람이 있으십니다. 전해주시라던데요?>

<처음 받는 선물치고는 생각보다 너무 큰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는 선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은 집에 돌아와서도 봉투를 열어보지 못했다. 트레이너에게 전하는 그 표정이 어떠했을지 그림을 그려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우주를 품어 안듯이 봉투를 끌어안았다. 세상은 참고 공들여서 인내하면 못 얻을 것이 없다고 자신했다.

여자! 그것도 원하는 여자! 운명과 바꾸어서 얻어지는 그런 여자의 체취가  제 손이 아닌 제 가슴에 안겨있었다. 뜯어서 열기만 하면 된다. 봉투 안에는 그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분사분한 정담들이 담겨져 있을 것이었다. 부풀은 가슴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사실이 또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여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이라고 맹세를 하였다. 여자가 해 달라고 하면 교수형에 달려 대신이라도 죽어줄 수 있었다. 여자가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 일평생을 그녀 곁에만 있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신성한 의식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봉투의 가장자리에 가위를 가져다 댔다. 열린 봉투를 거꾸로 들어 쏟기에도 아까웠다. 손을 안으로 넣어 잡히는 빳빳한 촉감을 집었다. 사진이었다. 사랑하는 너무나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첫 선물로 받아서 행복했다.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영원무궁토록 간직하라고 새겨서 주신 사랑의 증표였다. 사진은 굵은 손가락을 따라 봉투 밖으로 나왔다. 꺼내놓은 사진은 여인이 아니었다.

낯익은 남자였다.

 

한 장 한 장이 넘겨질 때마다 알몸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소름끼치는 전시품이었다. 누군가 사진을 찍으려고 세워놓은 누드모델도 3류 포르노 배우가 아니라면 살차기 비틀어 부끄러운 곳은 가리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사진속의 주인공은 3류 포르노 배우보다도 가려진 것이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의 눈빛 한 점도 놓치지 않았다. 찍은 사람도 그렇겠지만 찍힌 사람에게서도 선량한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사진은 찬찬히 넘겨지지 못하고 허공에 뿌려졌다. 두꺼운 인화지 소리가 차르릉 섞여 들리더니 지그재그로 낙하하는 사진들 보다 빨리 접혀진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무서웠다.

 

작은 종이쪽지 속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그래도 펼쳐 보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주워들었다. 망설였다. 눈길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여인이 자기 자신보다도 더 자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연정은 끝이 났고 사모는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자포하며 쪽지를 펼쳤다. 글씨는 정갈하고 단순했다.

[당신이 가진 것들을 먼저 청산하십시오. -SH,P-]

사진이 준 협박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고 여인을 따랐다. 그러나 여인은 가진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놓은 게 없었고, 남자는 버린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잡은 게 없었다. 여인은 잠깐의 필요를 즐겼을 뿐이었고 남자는 해바라기 인생을 자초하고 있었다.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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