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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43) 이 생각 저 생각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7 조회수78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1월17일 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ㅡ사무엘기16,1-13;마르코2,23-28ㅡ

 

       이 생각 저 생각

                            이순의

 

 

사람의 평화란 어디에 있는가?

흔히 대답하기를 자기 자신 안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기 자신 안의 평화를 다스리기가 어데 쉬운 일이며, 그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 만만하고 간단하더라는 말인가?! 자기 자신 안의 평화를 찾아서 누리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이탈해야만 가능하더라는 말인가?!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이 인간의 치열한 고행을 동반해야 하는것을, 그 인간의 기본인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초월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아를 평화로 이끌 수 있는 위인은 쉽게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인들도 얼마나 많은 평화와 초월적 가치관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조차 진정한 평화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사람들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랑과 용서와 희망에 대하여 무수히 많은 언어를 쏟아 놓는다. 그러나 그 무수한 언어보다도 진실한 것은 분명히 따로있다. 그 따로 있는 자기만의 터득을 굳이 표현하려고, 또는 가르쳐 주려고,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한다. 때로는 그 말이 평화를 깨는 오류가 되고..... 그 깨버린 오류를 또 평화로 이끌기 위해서 말하고 말하고!

 

진정한 평화는 기다림이다.

사람이 살면서 고뇌와 분쟁과 갈등과 이견 없이는 살아질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오히려 이런 고뇌와 분쟁과 갈등과 이견들이 없다면 사회는 고이고 썩은 물이 되어 인류 존속이라는 건강한 보약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르는 우려를 낳을 것이다. 굳이 그런 예측이 아니라도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의 구조는 자기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알리려하고, 그 알림을 통해 관계를 유지하려하고, 그 관계 안에서 평화를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모순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과 동시에 인간은 혼자라는 사실이다.

 

사회 안에서 내 생각을 전달하기도 하고 거절당하기도 하며, 남의 생각 또한 전달받기도 하지만 거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 생각이라는 구조 안에서 희비가 엇 갈리며 평화를 얻기도 하고 상실하기도 한다. 얻음과 상실에 따라서 인간은 또 사회적 동물의 본성을 발휘하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심성은 독립체라는 것이다. 내가 안간힘을 쓴다고 해서 타인의 마음이 움직이고 안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과 상관없이 인간의 심성은 사회적인 이윤 추구와 결부되는 것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 보다 쉬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무모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 이윤이라는 사회적 구조를 가미시키면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런 이익이나 관계도 없이 한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사기란 하느님만이 가능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가 사람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냥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이다. 내 생각과 같다고 해서 촐랑거릴 일도 아니며,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적대시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기다려야 한다. 마냥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 보지도 않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편견일 뿐이다.

 

세상의 질서는 정의가 없다.

시대를 따라 변천하는 것이고, 환경을 따라서 바뀌는 것이며, 직접 당하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관계는 사회라는 소속 안에서 이루어지며, 수 없이 많은 두뇌의 생각들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가슴의 마음들이 모여 부대끼고 시름하며 살아야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질적으로 평화라는 것을 자신 안에서 얻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저 사람이 조금만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면 내가 편할 것 같은데.....  

저 사람이 내 이야기를 이해해 준다면 정말로 평화로운데.....

나는 저 사람에게 나쁜 마음이 없음을 저 사람이 알아주어야 할텐데......

저 사람은 왜 내 마음을 저렇게 밖에 모를까......

 

그 작은!

그 조금만!

그 바람이 평화를 가져올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사회적 구조 안에서 피할 수 없는 고뇌와 분쟁과 갈등과 이견들을 지극히 개인적 인간인 내가 다 알고 얻고 나누려는 사고를 멈추어야만 한다. 그것을 멈추고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 보면 인연이 있으면 뭔가 실오라기 같은 줄이 연결되어서 라도 마저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고, 신만이 가능하실 인간의 심성이 나와 다르게 펼쳐져야 할 몫이라면 그것 때문에 불편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아니다. 그냥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 보면 때 되어 제 알아서 제 자리에 서거나 아니면 다른 자리에서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엮으며 살아갈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 안에서 살고 만나는가?!

그러나 태어나던 날 나를 받아 준 산파나 의사 선생님을 일생동안 보며 살아오지 않았듯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대학교 졸업까지 책임을 져 주시는 스승이 아니었듯이, 사람은 지금 내 앞에 나와 충실한 사람과 잘 지내다가도 다르다 싶으면 더 이상을 바라거나 요구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평화이다. 지켜 보면서 점점 멀어지면 이것이 다였다고 인정하며 지워주고, 멀어지는 가 했더니 다시 선명해지면 끈을 이어 동행할 줄 아는.......

 

그런데 그 기다림이라는 간단한 실전을 참아내지 못해서 자신 안의 평화를 깨는 것은 지극히 어리섞은 방편일 것이다. 사람이 고뇌와 분쟁과 갈등과 이견들 안에서 때로는 대판 싸움질도 하고, 행패도 부렸다가, 악다구니도 썼다가, 그러다가 평화를 얻지 못하고 그 싸움과 행패와 악다구니 속에서 허우적 대면 댈 수록 자기 자신의 영혼만 멍들어서 새까맣게 될 뿐이다. 결국은 자기만 아프다는 말이다. 다 떨구고 다 버리고 그러려니....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하면서 하늘이 열어주시면 맺고, 하늘이 안 열어주시면 말고, 기다리는 것이다. 

 

내 마음도 내가 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어 주셔야 열린다.

내 마음이 가두어질 때를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펴려고 해도 펴지지 않을 때는 지금 이 순간이 하늘의 뜻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지나놓고 나면 그 얽히는 순간도, 암담한 현실도,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도 하늘께서 필요한 순간이었다고 인정하며 나의 어리섞음을 인정하고 또 하늘께서 펴시는 때를 기다리며 평화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짝궁과 다툴 때도 미리 화살을 쏜다.

<주님! 지금 이 격분이 필요하시다면 더욱 분노케 하시고, 필요하지 않으시다면 제 마음을 다스려 잠재우소서.>라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남의 마음을 간단히 섣부르게 풀어주려고 나서지도 않지만 내 마음을 남의 어줍잖은 위로에 의존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냥 기다린다. 남의 마음도 풀어지는 날에 풀어질 것이지 내가 풀려고 해서 풀어지지 않을 것이며, 내 마음도 풀어지는 날이 오시면 나 혼자 풀어져야 즐거운 사람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구조 안에서 고뇌와 분쟁과 갈등과 이견들을 얻는다면 그 해결책은 내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 뜻대로 알아서 인도하시는 손길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기다림에 있다.

기다리다 보면 잊힐 것은 잊히고, 돌아올 것은 돌아 온다. 시간이 약이고 세월이 보배라는 말이다. 공연히 짧은 생각으로 단시간 내에 모든 일을 이으려는 사람은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늘 평화롭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변함없이 지치지 않고, 불편해도 따가워도 참고 견디며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자기 훈련이다. 그 훈련의 가치가 지금 나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 해도 낯설은 곳에서 방황하며 갈등하는 나 보다는 훨씬 큰 평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나도 기다리고, 짝궁도 기다리고, 아들도 기다리고, 남도 기다린다. 펴고 오므리는 것은 때 되면 주님 알아서 해 주시겠지! 나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기다림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을 뿐이다. 잊을 것이 있다면 잊힐 것이고 새길 것이 있다면 선명해지겠지! 그러면 그때 거동을 해 보면 될 것이고..... 평화를 구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고, 그저 기다린다. 그것이 가장 큰 평화였던 것 같은데!

 

ㅡ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2,27-28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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