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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39)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46쪽 부터 50쪽까지)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18 조회수671 추천수5 반대(0) 신고
 

긴 여행에 관한 약속 --- 셋 --- (46쪽 부터 50쪽까지)

                                                     이순의

 

 

<문장의 기술은 부족할지라도 쓰기는 열심히 썼으며 이 시대의 누군가는 살고 있을 이야기를 제 부족한 솜씨로 완성해 보았습니다. 묵상글은 아니구요. 순수창작 소설입니다. 그 안에서 묵상할 것이 있다면 안으시고 묵상할 것이 없다면 그저 지어낸 이야기 한 토막의 재미를 즐기시라고 알려드립니다. 열심히 수고하여 마련한 것이므로 사랑하는 벗님들께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굿뉴스의 벗님들께 이 시대의 누군가 살고 있을 이야기를 드립니다. 2006년1월9일 월요일 부터.......>

 

ㅡ읽기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칸을 두었습니다. 단락과 무관합니다.ㅡ

 

-계속-



         이순의

 

 

다시 흥순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풀리는 이야기의 정도가 의외를 넘어 어찌나 초월적이던지 경황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모텔에 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찻집에서도 거리에서도 그렇다고 흥순의 집이나 내 집에서도 도저히 나눌 수 없는 추악한 불륜이었다. 성스러웠던 보육원의 과거는 절망의 수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선희언니가 그 남자를 지금까지 이용만 해 먹은 애인이었어? 부자 집으로 시집을 가더니 환장을 했구먼? 그렇게 추접한 돈을 받아서 아이들에게 줄 수는 없지! 그냥 돌려줘라. 그따위 화냥기 밝은 마나님은 돈 밖에 없었나 보지? 옛정을 생각해서도 이럴 수는 없지.>

 

보육원에서 얌전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선희였다. 예쁘고 착하고 말수 없고 세상에서 여인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은 다 가졌다고 해도 누군가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선희가 아니었다. 당연히 탐나서 넘보는 사람들도 제법이었고 훌륭한 규수자리임에는 분명하였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하여 보육원의 동료를 추접한 하수인으로 계산하고 있더라는 말인가? 차라리 가용에 보태 쓰려고 시작한 흥순의 윤락은 떳떳하고 정당했다.

 

먹고 살만한 생존의 정도를 넘어 외간의 수컷을 차지하는데 소모되는 물리적 욕구들이 흥순에게까지 지불되었다면 사람의 가죽에 금수의 탈을 두르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재물을 소유한 선희라면 당연히 보육원에 기부를 했어야 어울리는 인격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생활을 따라 생존이라는 돌파구에 허덕이느라고 보육원을 찾아볼 겨를은 놓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불쌍한 영혼들마저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인생이라는 구체적인 좌절과 낙심이 올 때면 그들이 가장먼저 일으켜 주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얼마든지 감사하며 사는 그들이 있어서 용기가 되었고, 손가락 발가락이 성하지 못하고 생각이 온전하지 않아도 기쁘게 사랑할 줄 아는 그들이 있어서 자식들의 건강한 투정에도 행복이 컸었다. 보육원의 기억은 얼마나 많은 일상의 시련들을 극복하게 해 주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선희의 생활이 폐륜의 도를 능가하는 음흉의 산실이었다면 쉽게 용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의 노여움은 흥순의 입을 봉하고 말았다. 흥순이 선희에 대하여 더 이상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목구멍은 포도청이 되어서 쏟아야할 노동이 필요했던 거야! 살덩어리는 빈둥빈둥 놀리면서 내장에는 기름이 피둥피둥 쌓이고 정신은 오갈 데가 없다보니 그따위로 놀아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모름지기 인간은 배가 고파야해. 천하의 표선희가 그렇고 그런 인간으로 전락할 줄을 누가 알았겠어?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아니 글쎄! 언니, 그렇고 그런 표여사께서 오늘 다시 나타나신 거야. >

<오늘? 또 돈을 가져왔나보지?>

<그래. 언니! 하지만 그 언니 성품이 내가 듣고 싶다고 해서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들어줄 사람도 아니잖아요?! 용건만 놓고 가버리는 사람! 내 쪽에서 알아들어야지?! 그래서 언니를 보자고 한 것이고.......>

 

선희가 돈을 들고 다시 나타난 이유는 간단했다. 흥순이 사내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선희는 발이 고운 한산모시에 검정색 먹물을 진하게 들인 고급 개량한복을 입었고 같은 모시 천으로 챙이 넓고 화려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흔하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손에는 오죽을 쪼개어 역은 대나무 가방이 들려져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정의 고상한 품위가 좔좔좔 흘렀다. 그리고 언어보다 행동이 앞서서 두툼한 봉투를 건네고 있었다. 흥순도 예전처럼 선희를 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고상한 위선과 절제된 환락에 대하여 알만큼은 알고 있었다.

 

<우리 오랜만이지요?! 그런데 저를 뭐로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언니는 돈 있는 남자를 만나서 외간남자를 소유하지만 저는 돈 없는 남자를 만나서 외간남자가 필요합니다. 그게 다른가요?>

선희의 표정은 한 치도 동요하지 않았다. 차고 가는 시선으로 정확하게 흥순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의 위력은 폭발할 것 같은 압력으로 정지된 침묵을 압도하고 있었다. 흥순은 다시 선희의 고상한 품위와 절제된 표정 앞에서 현기증이 엄습하고 말았다. 순간을 놓칠 선희가 아니었다. 다시 만난 흥순에게 던진 말은 저속한 화류계 여인들의 잡소리였다.

<만나자마자 했다며? 상스러운 계집!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여자를 만나서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아. 그러나 결코 행복해져서는 안 되지. 오늘은 엄선생의 몫이 아니야. 전해줘요.>

 

선희가 일방적으로 놓고 간 돈을 흥순이 받았다고 해서 관계를 모욕당하는 발언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흥순 자신은 영업이 목적인 보수가 개입된 일이었고, 불륜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한 남자의 일생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선희 따위가 훈계할 일은 더욱 아니었다. 흥순은 낮고 작은 소리의 밀어들이 추접한 진창에서 오고갔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남이야 만나자마자 누웠든 만나자마자 벗었든 사내놈에게 그런 것까지 구속하시는 여사님의 솜씨는 수준급이라던데 왜요? 사랑에 타버린 그 불쌍한 사내놈에게 고명하신 분께서 직접 전하시지요?!>

<나는 가진 게 이것뿐이거든. 전해주면 알게 되지. 쓰레기들!>

 

선희는 끄떡도 하지 않고 곧게 앉아서 표정 한 점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다. 흥순은 차라리 무조건의 항복을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선희는 흥순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선희의 흔적은 봉투만이 덩그렇게 남아 흥순을 비웃었다. 돌려주려고 집어 들든 전하려고 집어 들든 그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아래 땅 위에 선다는 자체가 치욕이었다. 허망한 슬픔은 오롯이 흥순의 몫이었다.

흥순의 남편도 선희의 남편도 아닌 외간의 사내를 놓고 자매나 다름없는 사람끼리 매도하고 매수하는 지경의 상황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한때나마 함께 살았던 선희에게 저토록 천박한 말을 쏟아버린 자신을 용서하기가 싫었다. 후회했다. 지금까지 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살은 편리들이 진심에서 부끄러웠다. 아무리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지만 이 얼마나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흥순은 지칠 줄 모르고 눈물을 쏟았다.

 

<언니. 나는 결심했어. 돈을 돌려줄 거야. 꼭 돌려주어야해. 그 일을 언니가 좀 해줬으면 해. 언니라면 돌려줄 수 있을 거야. >

<그래. 우선 한잠이라도 자고 일어나서 신중히 생각을 해보자. 너무 울어도 몸살이 나는 법이야. 좀 자둬.>

흥순이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모텔을 나왔다. 여름밤의 새벽은 시원했다. 하천변 숲에는 돗자리를 깔고 누운 가족들도 있었고, 용돈이 궁색해 보이는 어린 연인들의 안타까운 애정행각도 계속되었다. 저들에게도 요지경 속의 세상은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눈물의 씨앗이 될 사랑은 저토록 달콤한데 장구한 운명의 장난은 인연을 만들어 내겠지!

 

연!

사람의 인연!

야심한 시각에 모텔에 두고 온 인연도 내게는 소중했다. 보육원에서 헤어진 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인연도 내게는 똑같이 소중했다. 만나고 싶었다.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다. 선희가 반겨주든지 않든지 꼭 한 번은 만나야할 인연이었다. 어떻든지 임경옥처럼 죽어버리지 않고 살아있음에 감사하자고 다짐했다.

선희를 만났다.

어렵게 어렵게 선희를 만났다. 흥순이 알려준 날자와 시간에 맞추어 그 교외의 찻집에 미리 도착하여 자리를 잡았다. 선희 쪽에서도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고 있는 모습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흥순의 말처럼 선희는 차에서 내려 검정이라는 색깔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거친 일과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시달리던 보육원에서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찻집의 현관이 열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웨이브 파마머리에는 유명한 수입브랜드 상표가 디자인된 핀이 꽂혀있고, 배꼽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날 듯 말듯 한 검은 티셔츠의 가슴에는 동일의 상표가 가지런하고 현란했다. 엉덩이에서 볼륨을 살려 무릎까지 타이트하게 내려오다가 종아리부분에서 나팔모양으로 퍼진 치맛자락 옆단에도 메이커의 상표가 쭈우욱 한 줄로 장식되어 여체의 선이 요염하게 살아났다. 어깨에 걸쳐진 커다란 가방에는 유명한 상표가 얼굴 두 개만한 크기로 겹쳐져 있었다. 걸어오는 선희의 구두에도 그런 상표가 있을지 궁금했다.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은 선희의 검은색 치맛자락 밖으로 검정색 구두가 검정색 스타킹을 신은 발을 담고 쏘옥 내밀었다. 발등 위에서는 투명 장식의 다이아몬드들이 직선의 반사광을 퍼트리며 빛나고 있었다. 그 상표 모양이었다. 정말로 돈이 많기는 많아보였다.

<김선생. 만나고 싶었어요. 변하지 않은 사람은 김선생뿐인 것 같습니다.>

<언니는 목소리가 여전하시네요.>

선희는 더 이상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다 알고 오셨을 테니 본론부터 말씀 드리지요. 제가 김선생을 보자고 한 이유는 제가 드린 돈을 꼭 그 남자에게 전달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엄선생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설득을 해서라도 그 돈을 꼭 엄선생의 손으로 전달하게 해야만 합니다. 김선생이 설득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엄선생은 많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충격도 크고.......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에는 양보가 없을 듯합니다. 저는 그 부탁으로 왔으니까 꼭 돌려드려야 하구요.>

 

선희가 준 돈은 모두 현금이라서 뭉치 돈이었다고 했지만 흥순이 나에게 돌려주라고 준 돈은 수표 한 장의 종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받기보다 돌려주기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냥 흥순이 받았다고 하는 것처럼 하얀 봉투째로 탁자에 올려놓고 선희 앞으로 밀었다. 선희는 얇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찬찬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선희에게 결혼생활은 사랑이상의 완전한 행복을 안겨주었다.

너무나 부족함이 없는 행복은 불행이라는 숙제를 기다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행복에 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헬스클럽에서 부터였다. 클럽을 옮기면 옮기는데도, 종목을 바꾸면 바꾸는데도, 가는 곳마다 남자가 있었다. 선희는 상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정이라는 성역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 동안 칩거를 했었지만 그 남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선희는 알지 못했다.

 

다만 남편이 가져온 사진들 속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현장의 증명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선희 자신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곳에 남자가 있었다. 부부사이에 존재했을 행복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그리고 깰 수 없어서 존속시키는 의무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남편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남편의 노력으로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냉담 당한다는 것은 극도로 불안정한 비애였다. 선희의 외로움이 시작되었다. 아이들만 바라보며 낙으로 삼기에는 너무 젊었고,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근심을 분산시키지 못했다. 남자가 필요했다.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모멸의 성만 높일 뿐이었다. 

무관심은 깊어갔고 적막은 쌓여갔다.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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