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Agere sequitur esse)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20 조회수1,494 추천수13 반대(0) 신고


독서: 1사무 24,3-21
복음: 마르 3,13-19

어떤 본당에서 오늘 독서의 대목을 가르치게 되었다.
다윗이 자기를 해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울을 
손쉽게 처치할 수 있었는데도 살려주는 장면이다. 

다윗은 사울을 해치울 기회가 몇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부하들은 모두 사울을 해치우자고 했지만 
다윗은 번번이 "하느님께서 기름부으신 분을 손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마침 그날 아침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강의 시간 삼십분전에 도착을 해보니 반장이 쩔쩔매고 있었다. 
마이크를 쓸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사무장님이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오시게 되었는데, 
수녀원에 비상 열쇠가 있으니 가져다 쓰라고 전화가 왔더란다. 
그런데 수녀님께 말씀드렸더니 사무장이 직접 말을 안 해서 
사무실 열쇠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이크는 사무실에 있었다.
강당엔 칠십 명쯤 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 목소리는 작은 편이다.

반장은 "어떻하죠? 어떻하죠?"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전에도 그 성당에서 비슷한 경우가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성체 조배하고 나서 생각하죠." 하고 성당으로 들어갔다. 
"주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이상하게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 수녀님이 몹시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강의 시간 5분을 남겨놓고 내려왔더니 
마이크가 교탁에 놓여져있었다. 
반장은 수녀님께 한 소리를 들었는지 눈물을 닦고 있었고 
옆 사람들은 씩씩대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성토가 일어났고 
그 성당의 신부님도 비슷한 분이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무런 반응도 안보이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마침 이 대목이 나오니 나도 모르게 예정에 없는 말을 하였다.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강의 진도보다는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서 
''하느님이 뽑으신 사람''들의 대표로 생각되는 
성직자, 수도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 강의하게 되었다. 

마침 학교에서 교회법 시간에 배운 것을 그대로 떠올려 
신자들의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위로해볼까 진심을 다했다. 

"우리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부족한 인품 때문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미워하다가 결국 그 일 때문에 
고해성사까지 보아야 하는 쪽은 또 우리들입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맞다! 고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워서 교회를 떠날 수도 없고,
다른 교회에 가면 안그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은 수틀리면 성도들이 갈아치우기도 한다는데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여러분은 어떤 성직자를 원하십니까?"
"따듯하고 기품있고 검소하고 희생적이며 사랑 가득한 사제, 
기도 열심히 하고, 강론 잘하고, 생각이 깊고 공평한 사제.... " 
사람들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마구마구 쏟아냈다. 

"교회법 1008조는 성직자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제정에 의한 성품 성사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 중의 
어떤 이들은 불멸의 인호가 새겨지고 거룩한 교역자들로 선임되어, 
각자 자기 계층에 따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도록 축성되고 임명된다." 
(마침 숙제라서 외우고 있어 칠판에 적어주었다 ^^*)

"위의 교회법에 의하면, 성직자란 
첫째 신품 성사로써 불멸의 인호가 새겨진 분들입니다. 
즉 존재론적으로 신원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둘째, 이분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리하는 삼중직무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는 기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즉 사제직, 왕직, 예언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분들입니다. 

먼저 것은 존재론적인 변화요. 
둘째는 기능적 변화입니다. 

우리가 성직자들을 보고 때로는 존경을 보내고, 
때로는 실망을 하는 것은 두 번째 역할에 대해서일 것입니다. 
따듯하고, 기품있고, 검소하고 희생적이며 사랑 가득한 사제, 
기도 열심히 하고, 강론 잘하고, 생각이 깊고 공평한 사제를 
원하는 것은 거의 다 성직자들의 기능적 측면에 관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는 것입니다. 
이 말은 존재보다 행위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이나 역할을 잘한다고 성직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직자가 되었기에 그 일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자녀를 잘 돌보고 살림을 잘하는 것으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사실 때문에 
자녀를 돌보고 살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거꾸로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일 잘하는 파출부가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기능이 우선 이라면 우리가 병이 들거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우리의 부모 자리를 누군가 대신해도 좋겠습니까?

''아이엠 셈''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어른이지만 7살 짜리 지능을 가진 아버지니까 
다른 아버지로 대치해야 한다는 법정논란이 나옵니다. 
우리는 샘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이런 이야기지요. 
성직자는 성직자 자체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자신의 기능, 직무에 결함을 보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리로 보여주지 못한다 해도 
그분 존재 자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하느님의 제정"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제정'',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것에 가톨릭 신자라면
이의를 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성직자에게만 해당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이 선택해주신 자녀라는 신분으로 
이미 존재론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나고 특출 나서 뽑힌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학교 교회법 교수신부님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누구보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성직자들이라는 것과 
그러기에 성모님의 마음으로, 
사제를 기른다는 심정으로 돌봐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고 뽑으신 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예수님과 같이 기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훌륭한 성직자 뒤에는 훌륭한 평신도들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직자니까 맹목적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밤을 새워 뽑으셨다는 그분들을 위하여 
우리들도 함께 기도하고, 
성모님의 마음으로 돌봐드려야 할 것입니다."

강의는 그렇게 끝이 났는데,
성경공부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말씀이었다고 
뜨겁게 박수를 보내 주셨던 그분들을 기억합니다.
아침 소동 끝에 상처받은 몇몇 분들은 손수건을 꺼내셨습니다. 
 
(오늘 독서의 이 대목들을 어디에서곤 강의할 때마다,
그 수녀님의 이야기는 아마도 끝까지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유다가 거명될 때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단서가 붙는 것처럼.) 

One Last Look

사진은 수유 1동 본당 홈피에서 가져왔습니다.

위 글과는 아무 연관없이 서품식 장면이 멋있어서요.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