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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왕의 춤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24 조회수1,046 추천수11 반대(0) 신고

 

독서: 2사무 6,12ㄴ-15.17-19
복음: 마르 3,31-35

다윗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예루살렘에 정착했다.
예루살렘은 이제 통일 왕국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으나 
다윗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종교적 구심점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윗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하느님의 궤''''를 모셔오기로 한다.
그 궤는 실로에서의 전투이래 블레셋 수중에 있었다. 

다윗은 블레셋을 쳐부수고, 궤를 되찾아온다. 
블레셋에서 연속적으로 재앙을 일으켰던 궤를 되찾아올 때
백성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다윗은 그런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온갖 악기를 동원하며,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궤를 운반하던 소들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궤가 뒤집히려하자 ''''우짜''''가 그것을 붙들었다.
그런데 그만 그 자리에서 우짜가 우쩌다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백성들의 공포감은 극에 달하고 다윗도 모시길 꺼린다.

궤는 일단 갓(블레셋)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맡겨놓았는데,
어쩐 일인지 석달 동안 그의 집엔 축복만 쏟아졌다.

다윗은 다시 기뻐하며 궤를 모셔오게 된다.
오늘 독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다윗은 제물을 바치고, 모시에봇을 입고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면서 궤를 모셔온다.

어쩐일인지 이번에는 궤가 아무 말썽도 안 일으키고
순순히 예루살렘 도성으로 따라 올라왔다.

여기서 우리는 의아심을 갖게 된다.
궤가 엎어지려고 해서 그것을 막았는데
왜 우짜는 죽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쉽게 변하는
하느님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까?

사무엘서는 이에 대해 아무 답도 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여러가지 가정과 추측이 많다.

먼저번에는 합당한 절차와 예식을 갖추지 않아서,
즉 사제가 입는 에봇을 걸치지 않았고, 
일정한 예식을 통해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계약궤를 옮기는 방식과 규칙을 위반해서,
우짜가 죽었다고 풀이하는 해석이 있다.
1역대 15,12-15과 유다인 랍비들의 주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랍비들이 기초하고 있는 역대기 저자는 
애당초 제관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점,
즉 제의식의 규범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본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모세가 입었던 속이 훤히 보이는 모시에봇은 
대사제들이 예복 위에다 입는 화려하게 장식된 에봇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현대의 해석도 있다.

다윗의 첫 번째 부인, 사울의 딸 미갈은
그 모습으로 온통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여자들 앞에서 주책이라고 비웃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제가 입는 에봇이 아니었다는 말도 일리있다.

자,혹시 이런 시각으로 한번 추정해보면 어떨까?

하느님은 먼저 번에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레를 뒤집어 엎으려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짜가 막았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막은 것이다.
마치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호통을 치셨던 대목과 상통한다.

그것은 또한 예루살렘으로 가서 명성을 떨치자던
예수님의 형제들의 권고를 뿌리친 요한복음의 내용(7,3-9)이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의 권유를 매몰차게 뿌리친 부분이나
"누가 내 어머니며 형제냐?"고 핀잔을 주시는 대목과도 일맥상통한다.

일단 냉정하게 거절하고 매몰찬 말씀을 하시면서도
결국은 그들의 권유대로 행하셨다는 점이 이상하다.

형제들이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잇달아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다만 그들이 원하던 방식이 아니라, 
남몰래 드러나지 않게 올라가셨다는 점이 다르다.(요한 7,10)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도 결국 어머니의 간청을 들어주신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인하는 듯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 내 누이, 내 어머니다" 
이 말씀은, 그분들이 혈연 때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었기에 중요한 위치였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를 주도하였던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알고 있는 마르꼬 복음사가로서는 그의 혈연의 중요성 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의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자 그렇다면 다시 독서의 부분으로 돌아가자.
하느님은 다윗이 당신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할 때에는
그의 정치적 야욕에 이용되실 수 없는 분임을 분명히 보여주신다.
주권은 어디까지나 당신께 있음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다윗의 성이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하느님의 궤도 다윗의 전리품 쯤으로 생각하게 할 수는 없다.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심을
만천하에 보여주시려고 하신다.
재앙의 도구나 되는 것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당신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마음이 아니라
기꺼이 춤이 절로 나오는 두려움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을 대하시길 원하신다.

미갈의 비웃음에 대답하는 다윗의 응답(21ㄴ-22).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느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말''''
자신을 왕으로 세울 수도, 폐할 수도 있는 분.
그분 앞에서 자신은 일개 춤꾼에 불과하다는 것.

즉 진정한 왕은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심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연출과 의도에 따라 춤을 출 뿐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주권과 자신의 신분을 새삼 깨달은 자의 고백이다.

그에게 영광이 되는 것은 왕의 체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비위를 맞추고, 좌지우지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춤을 추듯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1.Andante - Pr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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