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함께 가자, 이 길을!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1-26 조회수750 추천수9 반대(0) 신고

독서 : 2티모 1,1-8; 티토 1,1-5
복음 : 루가 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당신에 앞서 미리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당부의 말씀이다.

72명의 제자들을 둘씩 보내셨다!
산지 사방으로 퍼져나간 주님의 일꾼.
그 많은 일꾼들로도 모자랄 정도의 수확량.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
왜 일꾼도 당신이 미리 알아서 보내주시지 않는가? 
왜 꼭 주인님께 청하라고 하시는가?
왜 꼭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보내시는가?
(''둘은 증인의 효력이 있으므로''라는 그런 성서지식을 버리고 생각해보자)

본당에서 봉사자들을 바라볼 때,

"주인님이 보내주신 일꾼"과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뽑은 일꾼.
또는 제발로 걸어들어온 일꾼.

이 생각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느님 일을 한다는 본당의 일꾼들이 
항상 좋은 맘으로 화합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항상 잡음이 나게 되어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꾼을 만나기가 더 쉽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보내신 일꾼으로서 
그분의 뜻하신 바 있을 것이라는 의식을 갖는다면 
사사로운 감정에 쉽사리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꾼의 능력에 주안점을 두기보다는 
''하느님이 보내주신''에 주안점을 두게 될 것이다. 
일보다는 사람, 
또 그 사람을 파견하신 분에 관심을 두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하느님이 보내신 일꾼들''이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는 
서로의 단점마저도 서로를 보완해주라는 하느님의 뜻으로, 
서로의 엇갈린 의견들도 공동체의 다양성을 위한 하느님의 지혜로,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사랑의 학습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능력있는 일꾼으로서 불리움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배우는 제자로서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간의 사랑을 배워나가는 학교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일흔 두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수확할 일꾼을 청하라는 당부를 제일 처음 하시는 주님의 속내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가기 전에, 먼저!
 
서로가 서로를 주님께 간청해서 
주님이 보내주신 일꾼, 협력자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제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을 때, 
그들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들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바울로의 참된 협력자, 영적인 친구, 
든든한 후원자였던 티모테오와 티토.

바울로는 티모테오와 티토를 ''아들''이라고 부른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이 보내주신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함께 복음을 전하며 함께 신앙을 나누면서도 
우리는 혹시 동료들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능력을 비교하려할 때, 경쟁자가 된다.
자기 의견만 성취시키려할 때, 방해자가 된다.

사사건건 나와는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
기호와 취미가 너무나 달라서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
그들이 혹시 나의 단점을 보완해주고 완성시켜줄 협력자로 
주님이 보내주신 일꾼은 아닐까? 
시노두스![synodus 함께 + 길,여정]

우리의 주님은 함께 길을 가라고 하신다.
저 혼자 전력질주하여 골인하길 원하지 않으신다.  
저 혼자 멋지게 완성하길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동료
어쩌면 반대자를 짝을 붙여주셨을지 모른다.
모자란 사람, 넘치는 사람을 한데 엮어 주셨을지 모른다.
정적인 사람, 동적인 사람을 짝을 지어주셨을지 모른다.
이성적인 사람, 감성적인 사람을 묶어 주셨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함께 가자, 이길을.
혼자 가는 것보다 더딜지 몰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 어려울지 몰라도.
 

 베토벤의 미뉴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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