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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롭고 거룩한 사람'/ 유광수신부님의 성경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02 조회수685 추천수2 반대(0) 신고

<의롭고 거룩한 사람>(마르 6, 17-20)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 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6,19-20)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라고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 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듣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칭호를 아무나 듣는 것은 아니다.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호로 불리우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요한은 명예를 버렸고 목숨까지 바쳤다. 그러니까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칭호로 불리기까지에는 엄청난 대가를 치룬 것이다.

 

 요한이 죽임을 당한 것은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헤로데 임금의 불의를 보고 정의를 외쳤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대부분 우리는 불의를 보고도 정의를 외치지 않고 오히려 임금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말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고 하느님께 불평하고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해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전혀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불의 앞에서 용감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말할 수 있을까?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고 하였다. 헤로데가 말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의 삶은 의롭고 거룩한 삶을 추구해온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 세례자의 인생이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롭고 거룩한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는 것이 일관된 세례자 요한의 삶의 철학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남이야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또 자기가 한 일로 인해  자기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가 하는 일이 의롭고 거룩한 일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일을 위해서 살고 그 일을 위해서 죽었다. 그렇지만 다시 부활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결국 세례자 요한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다가 죽음을 당하시게 될 예수님의 삶을 미리 보여 준 것이다.

 

 우리도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의롭고 거룩한 일인가? 나는 의롭고 거룩한 것을 위해서 살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람을 부를 때 "욕심많은 사람, 이기적인 사람, 돈만 아는 사람, 욕심쟁이, 의리를 저버린 사람, 짐승만도 못한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 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참 좋은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친절한 사람, 베푸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남으로부터 "의롭고 거룩한 사람" 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말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오늘날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 보기 힘들다는 것이 아닐까? 모두들 적당히 살고 그리고 자기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서 부정, 거짓, 사기, 폭력 등을 동원하여 사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사람처럼 생각하게 된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요한 세례자처럼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욱 필요하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또 내 주위에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에 필요한 사람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 이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 35)이라고도 하였고 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가 7, 28) 라고 하실 만큼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최후가 너무 비참하게 끝났다. 한 아녀자가 품은 앙심 때문에 무참하게도 목이 잘리웠으니 위대한 인물의 최후치고는 너무나 불행하다.

 

 출세를 꿈꾸었다면 얼마든지 출세를 하였고 명예를 얻으려고 하였으면 명예도 얻었을 위치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마치다니?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도 그토록 칭찬하시던 사람이 그리고 한 평생 오직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의 최후가 이렇게 불행하게 끝나다니? 우리는 이런 운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렇다면 불행한 죽음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당하신 스승을 본받고 스승을 닮아 피를 흘리는 제자의 순교는 교회에서 최상의 은혜요, 사랑의 최고의 증명이라고 여기는 것이다."(교의헌장 5장 42항)라고 말하였다.

 

 순교라는 말은 희랍어로 Marturia(마르뚜리아) 라고 하고 그 뜻은 증거, 증인이라는 뜻이다. 즉 순교자란 진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귀한 생명을 바쳐 가면서 증거하는 사람이다. 요한 세례자는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최후까지 살다가 죽은 증거자인 것이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죽음은 불행한 죽음이 아니라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요, 최상의 영예로운 죽음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가장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태어난 생일인 것이다. 헤로데의 생일잔치는 새로 태어나는 요한의 순교를 위한 축하연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마태 5, 10-12) 라고 말씀하신 행복한 삶이 곧 세례자 요한의 삶이요, 죽음이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다. 희랍어로 증거는 "martus"(마르뚜스)라고 한다. 증거라는 용어는 "어떤 것을 기억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즉 증거자는 아무리 큰 어려움 앞에서도 자기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자기의 사명을 기억하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세례자는 죽음 앞에서도 비겁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의 사명을 증거한 사람이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죽은 요한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을 예고한다.

그리고 앞으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운명을 예고한다. 여하튼 인간은 죽는다. 어떻게 죽는가? 무엇을 위해서 죽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평범한 죽음과 순교는 엄청나다. 평범한 죽음은 그야말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지만 순교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말이나 글로 쓴 것이 아니라 증거자의 피로써 쓴 죽음과 부활의 첫 번째 선포였다.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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