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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적인 질투와 싸움-카인과 아벨
작성자홍기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03 조회수751 추천수4 반대(0) 신고

 

 

 

---카인과 아벨--- 

(영적인 질투와 싸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썩 기분 내키지 않는 묵상 자료이다. 그 설정과 이야기의 흐름이 결코 유쾌하지 않고, 결말 또한  우리의 상식이 원하는 권선징악의 형태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시고, 카인의 제사를 기쁘게 받지 않는다는 기준도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죄인도 악인도 선인도 모두 사랑하신다는 그 크신 사랑의 하느님이 왜 사람차별하시는 것일까?

 

그 내용이 우리에게 상징하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하느님이 그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영적인 질투이고, 영적인 싸움이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공동체와 그 쌍방이 모두 파멸로 가기 때문이다. 


 
그 영적인 질투로 인하여 이익을 취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살아가는 영적인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존중감의 결여에서 온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영혼에 대한 질투, 그것은 두 사람을 다 불행으로 치닫게 한다. 

 

아무리 따듯하고 겸손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와 아무리 깊은 사랑을 할지라도, 인격에 대한  존중감이 없으면 그 관계는 곧 깨질 만남의 관계이다.


 
카인과  아벨처럼, 그렇게  생존경쟁의 구조적 행태가 그대로 투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상호 교류하는 사랑과 성장에 가장 걸림돌이 영적인 질투이다. 

 

영적인 질투는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백설공주의 새엄마와 같이 파렴치한 행위를 끊임없이 계속한다.  그것은, 백설공주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되는 새엄마인 왕비의 비인간적인 모략과도 같다.

 

영적인 질투의 원인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댓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에 원인이 있다. 모든 세속적인  욕구는  노력을 할 경우, 대개 그 만큼의 댓가가 돌아온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영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을 더 비참하게 한다. 

 

올바른 은총을 받는 영적인 갈망이,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므로 어떤 형이상학적인  언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갈망하는 만큼 영적인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갈망이 없는 만큼 영적인 은총을 받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영적 갈망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더우기,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나누어 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 보시기에 은총은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만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은총을 받아서 그것을 보존하는 것도 힘들지만, 먼저 그것을 받을 수 있을만큼의 준비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영적인 질투의 해소이다.


 
영적인 질투는 대체로 사람이나 물질에 대한 소유의 욕망이 강한 사람이  또한 강하다.

 

우리가 영적인 은총을 받는 것. 그것의 기준은 온전히 하느님 자체에서 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기준조차 정확히 잡을 수 없지만, 성경에 나오는 은총을 받은 좋은 예를 찾는다면, 예수님의 탄생할 때에 예수님을 경배하는 행운을 만나는 어린 목동과, 동방박사 세 사람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린 목동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오는 것처럼, 천사의 말씀을 믿는 순수한 성품과  그 별을 따라 가는 실천력이  신비를 만나는 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표현된 목동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신비를 만나는 사람, 은총을  받는 사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천사의 초대를 받은 목동들과 정반대로,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세속적인 교육이나 환경으로 본래의 우리의 원형을 잃고 변질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목동들은  변질되기 이전의 본래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동방박사는 우리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사람은  이성과 지성, 경험과 이해의 폭이 올곧게 성장함에 따라 어느 적당한 시기에 이르러 신비를  접하게 된다. 그 적당한 시기에  영적인 열매를 맺게 되어,  그것을 취득, 이해, 판단하는 능력에 성숙한 정신과 마음이 높은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형태를 가짐으로, 일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비를 찾아 나설 수 있는 결단을 하고, 그 결단대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동방박사이고,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계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한 때를 어린 목동처럼 일찍 접하는 경우도 있고, 동방박사처럼 삶이 원숙해짐으로써 그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기도 한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진리를 접하는 사람들....

 

지성과 성실로 점진적인 노력을 하여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들.....

 

정작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죽을 때까지  정작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을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는 공정한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  하느님과 사랑을 교류할 수 있는 사람,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한 자질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그러한 은총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며, 그 자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교류하는 삶의 보금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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