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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허(虛)와 실(實)!!!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05 조회수705 추천수7 반대(0) 신고

 

                      

              연중 제5주일2006. 2. 5 - 사랑의 허(虛)와 실(實)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께서 ‘신심생활입문’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

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그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설명하신다. 그 처지와 직분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

어야 한다. 주교가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

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가, 또는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

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으며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착오는 극히 많다. 따

라서 세속은 참된 신심과 그릇된 신심을 구별치 않고 또는 구별하려고도 않으며 신

심을 배척하고 이를 비난한다.”

오늘의 복음서를 보면 앞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말씀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종일 바쁘신 분이었고 그리고 관상적 독수자처럼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 선포의 일로 하루의 24시간이

부족하신 분이셨습니다(마르 1, 29-34 참조). 허나 그러한 분주함 으로 피곤하실 터

인데도 주무실 새벽시간을 택하여 홀로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마르 1,

35 참조). 그분은 이렇게 기도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의 삶과 하시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 삼고

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그분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었습니

다.

참 신앙이라는 것은 매사를 하느님과의 연관 속에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

하는 것도 모두 기도하는 일이 됩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 모두가 다 하느님과의 관

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것은 곧 삶 자체가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오늘 복음

서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보면서 앞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 “진정한 신심은 아무 것

도 손상치 않고 오히려 만사를 완성시킨다.”고 덧붙인 말씀에 더욱 공감을 하게 됩

니다. “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지 않게 하며 꽃은 이전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참된 신심은 어떠한 직

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고 프란치스코 살레

시오 주교는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꿀에 보석을 담그면 그 특성적인 광채를

더 발산하듯이, 우리가 열심히 하는 일이 신심과 어우러진다진다면 더욱 아름다워

진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일들로 흘리는 땀은 그것이 기도 속에서 흘리는 것이

라면 진정 아름다운 보석이 될 것입니다. 위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

처럼 우리의 모든 활동을 기도 속에 담가야겠습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일은 진정 그 값어치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한가한 사람보다도

바쁜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교회 전통에 의해 하루에 여

러 번 정해진 시간대에 따라 성무일도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무일도

를 바치는 시간에 간혹 어느 신자가 전화를 걸어오든지 직접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

니다. 그럴 때 신자들이 사제의 기도시간을 배려해주지 않는 것에 대하여 원망스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오늘 복음서에 보면, 새벽잠을 주무시지 않고 외

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찾아와 그분의 기도시간을 빼앗았습

니다(마르 1, 36-37 참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즉시 사람들을 찾아가는 분이었습니다(마르 1, 38-39 참조).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문득 옛적 어느 수도원 수사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어느 수사

가 자기 방에서 기도서를 들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급한 일로 부탁을 하러 왔

습니다. 그 수사는 즉시 기도를 중단하고 나가서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

리고 돌아와서 마저 기도하기 위해 기도서를 펼쳐보니 자기가 중단했던 부분에서부

터의 기도문이 황금색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 보태는 황금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의의 실천으로 사랑을 위해 흘리는 땀은 우

리의 기도 속에서 보석처럼 값지게 빛날 것입니다. 그렇듯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로 바쁜 사람의 삶은 그 자체가 기도이고, 그런 일로 바쁜 사람은

동시에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늘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게 모두 하느

님과의 관계 하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더불어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들

어주는 일로 무분별하게 나선다고 그것이 모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친구가 주일인데도 함께 골프 치

러 가자고 한다 해서 또는 낚시질 가자고 혹은 일요일을 골라서 친목계원 야유회를

계획하자고 한다면 신자로서 미사봉헌을 하고 난삽한 일을 삼가 해서 주일을 하느

님께 봉헌하며 성화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킴으로써 신앙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

니다. 더욱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세속 정신에 영합해서 주일을 골라 혼인잔치나 회

갑잔치 등을 나서서 벌이는 일은 주님께 바쳐져야 할 기도의 날을 더럽히는 것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제로서 신자 분들께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사제의 기도시간을 존중

해달라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에게서 제가 들은 것입니다만, 스님이 하루의 시간

별로 예불을 드리는 시간대에는 일반 불자들이 스님에게 전화나 방문을 삼가는 것

을 예절로 삼고 있답니다. 그렇듯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께서도 사제들의 기도시간

을 배려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일을 준비하는 토요일에 사제를 일반인들

의 주말 습관대로 식사나 음주의 자리로 유인하면 그건 그야말로 사제의 소임 수행

을 훼방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는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가장 소중하고 본질적인 소임으로 삼고 있다

는 것을 신자들께서 알아야 합니다. 사제가 기도를 많이 함으로써 교회가 풍성해집

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자 분들께서는 이른바 사랑의 명분으로 사제들

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을 당한 사제

는 참으로 곤혹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저도 주일을 앞둔 토요일 밤에

가정이나 모임의 장소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가서 응대할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많았는데, 그리하고 나서는 시간 지난 성무일도를 바쳐야 하기도 하고 밤을 새워 새

벽까지 주일 준비를 하게 되고 이어서 주일 성무를 집행하는데 많은 지장을 받게 됩

니다.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 인간적 한계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느낌 가운데 저는

사랑을 명분삼은 허상과 실상을 식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 하더

라도 예를 들어 주일의 이른 시간에 어느 신자분이 위급한 일을 당했다든가 선종했

다는 전갈을 받으면 사제는 공적인 미사 시간 사이의 짬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

러한 경우에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새벽기도시간에 사람들이 그분을 찾은 일화

가 연상됩니다(마르 1, 35-36 참조).

이러한 저의 경험을 예로 들어 사랑의 허(許)와 실(實)에 대한 식별을 말씀드리는 까

닭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기도를 할줄 아는 삶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늘 기도를 바치며 사는 사람은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만큼 사랑의 요구를 당하는 처지에서 그 사정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러한 삶의 모습을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잘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로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바쁜 사람일수록 기도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고, 기도하는 사람일수록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오늘의 복

음서가 소개하는 예수님의 모습(마르 1, 29-39 참조)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는 일로

바쁘더라도 그 가운데 기도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라

면 그 하는 일 자체를 기도로 승화하는 자세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께서도 일상적으로 매인 일 가운데서 기도의 자세를 늘 갖추며 살아가

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앞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말씀을 인용했

듯이, 기도 속에서 사랑의 바쁜 일을 수행하면 꿀에 담긴 보석처럼 우리의 활동은 더

욱 값진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생 시절에 지낸 서울의 옛 신학

교 현관에 새겨져 있던 표어를 저는 새삼 저의 좌우명으로 다짐합니다. 그것은 “기

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러한 삶

을 오늘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 윤종관 가브리엘(안면도본당)주임신부님 ▒

 

 

                         


 
Pietro Mascani, Opera Cavalleria Rusticana
Intermezzo
 
Giovanni Marr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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