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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외딴 곳"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05 조회수821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2.5 연중 제5주일

욥기7,1-4. 6-7 1고린9,16-19.22-23 마르1,29-39

                                                            



"외딴 곳"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문득 떠오른 글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봄꽃들 만발한 봄철에 써놓았던 ‘개나리’란 시입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

사실 햇빛 환한 대낮도 너무 어둡게 느껴지는 오늘의 현실 같습니다.

밖으로야 고층 아파트들에 잘 정돈된 거리,
즐비한 자동차에 흘러넘치는 인파,
참 밝고 화려해 보여 착각하기 쉽지만
이면(裏面)의 현실은 참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희망 없는 어둔 현실에서,
대낮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개나리 꽃 같은 빛의 사람들이,
희망의 사람들이, 생명의 사람들이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

천국 따로, 지옥 따로 가 아닙니다.
희망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하느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외적으로야 아무리 힘들고 어두워도 희망 있으면,
하느님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장면에서 예수님이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온통 병자들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니, 그대로 희망 없는 지옥입니다.

예수님과 바오로,
1독서의 욥 같은 ‘하느님의 사람들’ 있어

비로소 살만한 세상이 됩니다.

아니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람들이요,
하느님의 사람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희망이듯, 우리 역시 하느님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이런 고귀한 긍지와 자부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지옥과도 같은 처절한 불행의 현장에서
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기도의 하느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 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탄식과 허무의 고백 같은 기도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솔직하고 정직하게 하느님 향해 쏟아 놓는 모두가
기도요 구원의 응답을 받습니다.

유비무환의 원리가 그대로 영성생활, 기도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는 이미 늦습니다.
평소 꾸준한 기도의 비축으로

영혼 육신을 튼튼히 하는 게 제일입니다.

밥 먹듯, 숨 쉬듯 기도와 말씀 공부의 생활화가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 바오로, 욥 모두,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바로 사막과 같은 삶 한 복판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이 생명의 기도 샘 있어
예수님 복음 선포에 항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빛과 생명으로 충전시킨 예수님,
복음 선포와 더불어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인 마귀들을 하느님의 빛으로 몰아내셨고,
하느님의 생명력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이 전달됐을 때 시몬의 장모의 열병도 나았습니다.

과연 여러분만의 은밀한 기도처,
하느님을 만나는 곳, 외딴 곳이 있습니까?

함께와 홀로 영성 생활의 자연스런 리듬입니다.
함께 일하고 살면서도
규칙적이면서 항구하게 고요히 홀로 기도할 외딴 곳의 마련은
생존을 위해 필수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만나야 넘치는 생명력에
내 정체성을 깨달아 견고히 합니다.
일중독이나 다른 중독들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기도 맛, 말씀 맛으로 하느님 맛 들여야
일 맛, 술맛, 밥맛, 도박 맛 등 세속 맛을 찾지 않고
밝은 몸,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 들여라,
복되다 하느님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라는 시편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 역시 기도를 통해
하늘 아버지와 만남으로 자신의 사명과 길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세상에 왔을까요?
바오로 역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깊은 만남에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고백이 나왔음이 분명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닿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된 바로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문명의 환한 대낮 같지만 이면의 어둠은 너무나 깊습니다.
모두가 빈부의 양극화의 심각성을 진단하지만
뚜렷한 대안은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보다도 깨어 기도하는 삶이 절실합니다.
세상을, 남을 탓하기 전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람 되어
빛으로 희망으로

어둠의 절망을 몰아내며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 불암산 처럼 기품 있게 사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글 있어 나눕니다.

“불암산의 기품은
  푸른 하늘
  배경으로
  멀찍이 뒤로 물러나
  늘
  한결같이
  자연스럽게
  모두의 넉넉한 품의 배경이 되어주는데 있다.”

이 복된 성체성사를 통해
생명과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치유, 회복 시켜 주시어

당신의 기품 있는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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