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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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6주일 강론] (심흥보 신부님)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11 조회수783 추천수3 반대(0) 신고

"거룩한 연옥 영혼을 위해서"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여하면
서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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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마르코 1,40-45

지난 주간에 최재봉 안나 할머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비록 누워는 계셨어도 따님들의 병구완으로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시니까 너무나 섭섭하고 인간 생명이 이렇게 끝나는 구나하고 생각하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장례미사를 드릴 때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처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참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되새깁니다.

장례 미사의 기도문은 하나 같이 주님께 우리 죄와 허물을 못 본체 해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보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시기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고별식 기도문’에서,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 이 교우를 맡기오니 나약한 인간으로서 저지른 죄를 주님의 자비로 용서하시고 하느님 나라에서 성인들과 함께 끝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리고 묘지를 축성하고 ‘하관 기도문’에서,

“주님 비오니, 죽은 우리 형제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족한 행실에 벌을 내리지 마소서. 이 형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사오니, 지상에서 참된 신앙으로 신도들 무리에 들었듯이 천상에서는 주님의 자비로 천사들 반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매일 미사 중에 평화를 구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 생애가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못 본체 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야만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밤마다 끝기도를 바치면서 양심 성찰을 해보면, 그저 내 생애가 부끄럽고 죄스럽기 그지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 뜨고 날만 새면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이리 왈 저리 왈 하고 떠들어 댑니다.
그리고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래서 문제고,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이렇게 또 저렇게 해야만 한다고 자기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 앞에, 아니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도 죽음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되새길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마태 6,27) 하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 질문에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감히 대답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명을 한 순간이라도 늘릴 수 없습니다.
아니 늘리기는커녕, 언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꽥하고 죽는 순간에도, 지금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니, ‘꽥!’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주님께서 주신 생명, 주님께서 도로 데려가시니 그러시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처지입니다.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주시는 대로 받고, 그저 주시기에 황송해하고 감읍하며 살아갈 수밖에!

그럼 우리 인간의 처지가 그렇게 비참해 보일정도로 미소하고,
우리 인간의 생명이 그저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을 뿐이지,
주님께서 부르시기만 하면 언제 어떻게든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미약하기만 한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아쉽고 씁쓸하지만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 다른 무엇이 더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처지가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고,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언제든지 다시 부르시면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제 데려 가실지는 모르지만 오늘 이렇게 살아있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요구할 수도 청할 수도 없는 생명 자체를 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명을 온전히 보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죄악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죄를 대신 씻어주시고 살 수 있도록 구원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과 성체성사를 남겨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셨고, 성체를 모시고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그 길을 우리가 깨우치고 발견하고 걸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애초에 우리를 다시 데려가시기 위해 우리 인간을 지어내신 것도 아니요, 언제든지 우리 생명을 회수하시기 위해 주님 생명을 나눠주신 것도 아니요, 우리를 어떻게든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주님 은총의 뜻이요 결실이 우리의 생애다.

우리는 언제 지상 생애를 마치게 될 줄도 모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우리를 소환하실 수 있다. 그야말로 처지로 말하면 정말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생으로 따지자면 아무 권리도 없고 연장할 수도 없는 우리를 오늘 이렇게 살려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주님 앞에서 오히려 우리는 감사할 뿐만 아니라 기쁘기까지 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늘 눈만 뜨고 입만 열면 내뱉는 불만족과 불평과 요구가 아니라, 인정과 감사와 순종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져야할 자세라는 것을 너무나도 자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나병 환자의 기도를 우리 자신의 기도로 바칩시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0)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1)

그리고 우리의 고쳐지지 않는 교만과 탐욕을 주님의 은총으로 깨끗이 씻고,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갚기 위해 형제들에게 증거하고 나누고 널리 전하며 기쁘게 살아가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일이 잘 풀리고,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언제 깨지고 어느 누구에게 빼앗길 줄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지탱되는 기쁨이지만, 주님과 형제들에게 바치고 봉사하고 나서 생겨나는 뿌듯한 기쁨은 참 기쁨이신 주님과 연결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마칩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그리고 혹시 시간이 나시고 기회가 되시면, 오늘 사제 수품 18주년을 맞이하는 저의 사제직을 위해 주님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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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더욱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요한 3,30)
예수님, 저는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
모든 성인들과 천사들의 기도와 선행도 한 대의 미사와 비교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저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저희의 전부가 되소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시면, 질그릇같은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 http://예수.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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