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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복을 되돌려주는 분 !!!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12 조회수601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6주일/행복을 되돌려주는 분

 

 

                                                 

 

 

오늘 우리가 읽는 제1독서의 레위기 13장은 사회통제에 관한 율법입니다. 법정전염

병 관리조항입니다. 당시 그 조항에 따라 한번 매장된 사람은 정상사회인으로 회생

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지요. 우리가 명화로 기억하는 ‘벤허’라는 영화에서 보았

듯이 모든 피부병을 나병으로 인식하던 당시로서는 그런 환자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하여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계곡에 가두어버리는 것이었지요. 오늘

의 레위기 13장에서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 45-46)고 말입니다.

그러한 선언은 사제가 하는 것이었는데(레위 13, 44 참조), 이는 곧 제도권에 의해서

그리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공민권 선언의 제도적 권한을 유다교 사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제도권의 선언에 의한 사회통제조항을 뛰어넘는 사건이 오늘의 복음서(마르

1, 40-45)에서 일어납니다. 제도권에 의한 그 권한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저 떠돌이

(?) 선생일 뿐인 예수님과 관련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으리만치 서슬 시퍼런 제도권을 뛰어넘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왜냐면,

당시 율법에 의하여 격리의 계곡에 처박혀 죽음이나 기다려야할 나병환자의 출현도

그러려니와 그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예수님께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 41)하고 참으로 겁도 없이 그 실정법을 무시하고 나설 수 있었는가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오늘날 무면허 의료행위처럼, 또는 변호사법 위반처럼, 더 나아가서

국가 통치권에 대한 도전처럼 즉각 입건되어야 할 사건입니다. 그것은 실정법을 정

면으로 위배한 행위인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결국 심상치 않은 당국의 대응조처를 초래할 것임을 잘 아시기 때문에 예

수님께서는 입단속을 당부하셨지만(마르 1, 44 참조), 그 일로 말미암아 당신의 활

약에 제약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셨을 그분이 어찌하여 그렇게 무모하게도

제도권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셨을까 하여 우리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이 우선이라는 점을 깨

닫게 됩니다. 사람의 목숨을 건지는 일은 모든 실정법에 앞서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

고 나아가서 한 사람이라도 사람답게 살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선 그 나환자를 치유하시고 나서 모세의 율법

에 따른 실정법에 부응하는 절차를 당부하셨습니다(마르 1, 44 참조). 그러므로 예

수님께서는 이미 실정법을 어긴 분으로 고발당해야 할 분이셨습니다. 사제의 허가

없이 그 나환자에게 손을 대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마르 1, 41 참조). 그리고 또한

그 나환자 자신도 실정법을 어긴 사람이었습니다. 왜냐면 그 역시 사제로부터 공민

권 회복의 선언을 받지 않고 그 격리 장소를 이탈하여 예수님께 다가오기 위해서 사

람들이 있는 곳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예수님과 그 나환자라는 두 사람은 이미 실정법상의

제도권으로부터 처벌 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인지 그 나환자는 치유 후에 사제에

게 가서 그 치유 사실을 보이지 않고 떠나가서 그 이야기를 퍼뜨리기 시작합니다(마

르 1, 45 참조). 사제에게 가보아야 처벌 받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불어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더욱 난처하게 되고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시게 되었습니다(마르 1, 45 참조).

이러한 사정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불행한 사람의 처지를 당신이 당하게 되었다

는 것을 암시합니다. 즉 나병환자가 정상인들의 마을에 살 수 없고 죽음의 계곡에 격

리되어야 하던 그러한 처지처럼(레위 13, 46 참조)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가지 못

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셔야 하는 분이 되셨습니다(마르 1, 45 참조). 그 나환자

를 치유해주신 분이 오히려 그 사람의 옛 처지를 당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 불행을 뒤

집어쓰시는 처지에까지 이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

에 극적으로 이르는 클라이맥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일 것입니다. 그

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 “이분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

이었구나!”(마르 15, 39)하고 실토하던 그 골고타의 사형 집행관(백인대장)의 고백처

럼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인 죽음을 당

신의 몸으로 당하셨다는 것을 깨닫도록 마르코복음서는 오늘의 이 나병환자 치유

사건에서부터 암시하고 있습니다. 진정 그러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그분에 대하

여 함부로 말할 수가 없음을 오늘의 복음서는 또한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 44)하고 그 나환자에게 당부하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그렇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어떤 질병이나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인간에게 참 삶을 되돌려주시는 분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

니다. 살아있어도 그게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그 나환자의 처지처럼

참 인간의 삶을 살지 못하는 불행의 인간에게 행복을 되돌려주시는 분으로 그분이

오셨음을 오늘의 그 나병치유의 일화에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

이 곧 구세주라는 신앙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이러한 신앙이 고백되지 않고서는 우리 인간에

게 참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 오늘 마르코복음서는 그 죽음

과 같은 처지의 나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

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 40)하고 부르짖었음을 보도하고 있

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영성체 전에 “주님, 제 안

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하고

고백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알아듣

지 못합니다. 요즘에 매스컴을 통하여 마치 새로운 경지의 불교적 깨달음에 이른 주

인공인 듯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 출신의 H스님은 그분이 전자에 천주교 신앙인이었

음을 무명(無明)이었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승려는 인간이란 본래 누가 구원해주

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불교적 화두는

늘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스스로 부처가 됨’을 그 가르침의 근간으로 하는 것이 불

교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이란 다른 말로 제가 표현하자면, 세상살이에 집착

하는 허상의 삶을 떨쳐내라는 것으로 그것이 진정 ‘참모습의 삶(眞如)’를 찾는 길의

제시인 것입니다. 그러한 불교적 구도의 길을 저는 부정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고 존

중하고 싶습니다만, 그 미국 출신으로 한국불교에 귀의한 H스님이라는 분이 자신의

걸어온 삶의 역정 중 그리스도 신앙의 과거를 비아냥거리면서 “나 자신 외에 구세주

는 없다.”는 식의 공언을 일삼고 있음은 그야말로 서툰 대중적 인기 발언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저는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현실을 보라는 말입니

다. 현실의 세상은 고뇌의 테두리라는 것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그 고뇌의 현실이

곧 오늘 복음서에 나타난 나환자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 나환자 같은 우

리 인생의 현실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시지 않고 거기에 당신 친히 참가하

신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하느님

께서는 우리 인간세계의 모순적 구조를 당신 것으로 뒤집어쓰심으로써 타개해주시

는 분이시라는 것을 오늘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실정

법에 의한 위험부담을 나환자 대신으로 당하신 당신의 처지로 하느님의 모습을 보

여주십니다.

저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 신앙으로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모두의 불행을 먼저 친히 받아드림으로써 해소해주는 구세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그분의 십자가상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는 더 나아가 확신합니다. 우리 인간들의 불행은 우리 인간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자

기 것으로 삼아주는 가운데 해소해 갈 수 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이, 고통은 서로 나서서 나눌수록 작아진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저는 한 사제로서 가끔 체험합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어떤 일

로 다른 사람과 의견이 대립될 경우에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당하고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내세우는 사람이 저보고 사제가 그럴 수 있

느냐는 식으로 우겨댈 경우에는 제가 그 상황의 탓을 덮어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러

한 상황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어찌 하겠습니까? 제가 누명을 쓰

고서라도 서로의 불행한 결과는 초래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해소에서 자

신의 죄에 대한 뉘우침 없이 다른 사람이나 세상만을 탓하여 말하는 신자에게 깨우

침을 주기 위해서 사제가 훈화를 하면 자기 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고해소 밖에

나가서 비난하고 다니는 신자를 사제는 쫓아가서 타이를 수가 없습니다. 무덤에까

지 고해비밀을 지니고 가도록 지켜야 할 사제는 고해소 밖의 그 어처구니없는 소문

에 응대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로써 사제로서는 그 사람의 죄를 대신 보속해야 합니

다. 고해소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사제는 대신 보속하기

로 마음먹고 그 죄의 사함을 주님께 비는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렇듯이 다른 이의 죄를 대신 감당해야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

의 불행이란 사실상 인간들끼리 부딪혀서 초래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 소개된 나환자의 처지는 사실상 인간들이 그어놓은 실정법상의 배타적 저

주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결

과적 상황으로 타개해주십니다. 그것이 곧 구세주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분

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인간들 사이의 불행을 먼저 자기 것으로 삼아주는 방

도로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그리 할 수만 있다면 그

때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불행의 울타리를 넘어 진정 행복을 발견하는 마음으

로 모여들 것입니다. 그렇듯이 오늘 복음서는 외딴곳으로 피해가실 수밖에 없으셨

던 그분에게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보도합니다(마르 1, 45 참조). 그래서

그분은 구세주입니다. 당신이 불행해짐으로써 다른 이에게 행복을 돌려주는 그분이

곧 구세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대신 당할 줄 아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모든

불행의 사람들이 모여올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우리 주변 사람들

의 불행을 감당하는 주인공들이 될 때 세상 사람들은 그 불행을 넘고 참 행복의 자리

를 이루는 한 식구로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윤종관 가브리엘(안면도성당)신부님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F장조 Op.24 <봄>

                                                제 1악장 알레그로 F장조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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