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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혹과 시련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14 조회수919 추천수8 반대(0) 신고

 

독서: 야고 1,12-18 복음: 마르 8,14-21 유혹은 일종의 시련이다. 수많은 유혹 속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독서에서 쓰여진 '시련'과 '유혹'의 희랍어는 같은 단어(페이라스모스)를 달리 번역한 것이다. 유혹과 시련,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므로 악마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유혹과 시련을 잘 극복하고 이겨냈을 때, 인내와 지혜와 신앙의 도약을 가져오기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성경의 다른 대목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야고보서 저자는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만큼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죄에 떨어지는 것은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그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것은 욕망도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 다만 욕망에 사로잡혀 통제하지 못하는 처신, 그 때문에 죄에 떨어진다는 것을. 죄의 결과는 죽음인데, 그것은 앞서 말하고 있는 생명의 화관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상황이다. 오늘 독서의 서두는 행복선언으로 시작된다. 시련을 이겨내고 생명의 화관을 얻게 되는 사람. 그것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라고. 야고보서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유혹과 시련, 그리고 욕망. 모두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매순간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화관을 얻게 될 것인지. 영혼의 죽음을 초래할 것인지.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인지.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인지.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누룩' 역시 두 가지의 의미로 쓰여진다. 하느님 나라를 빵을 만드는 반죽에 비유했을 때의 누룩은 지상에서의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킬 뿐. 본질을 변질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는 하느님의 구원을 자신들의 선업(善業)의 마땅한 보상으로 여겼다. 즉 구원은 무상의 선물이라는 본질을 변질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바리사이파의 누룩이다. 헤로데 역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그는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화려하게 지었다. 종교를 이용하여 자기 이득을 챙기는 행위. 이것이 바로 헤로데의 누룩이다.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시키는 누룩. 바리사이파들과 헤로데의 누룩.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신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 그것을 너희는 벌써 잊었단 말이냐? 도대체 그 기적을 베푸신 동기가 무엇인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공로 때문인가? 무슨 이득이 있기 때문이었나? 왜 이 간단한 사실을 그렇게 자꾸 잊어버리는가? 열심히 신앙생활한다고 생각한다면 허심탄회하게 자신을 돌아보자. 자기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꽤나 그럴싸한 일을 하고 있는 양, 어깨가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것부터 계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유혹에 빠져 죄에 떨어질까봐. 그런 시험에 걸려 넘어질까봐. 당신의 핵심제자들에게 이르시는 예수님의 염려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파와 헤로데의 누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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