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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 vs 실천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17 조회수723 추천수10 반대(0) 신고




독서: 야고: 2,14-24. 26
복음: 마르 8,24-9,1

루터는 "지푸라기만도 못한 복음"이라고 야고보서를 평했다.
생각같아서는 성경 목록에서 빼버리고 싶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기에 그냥 넣어두는 것이라고 하면서.

왜 이렇게 야고보서를 싫어했던 것인가?
'오직 믿음(sola fides)'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씀이 이 서간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실천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바로 오늘 독서의 대목이다.

야고보서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데,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친 행위(실천)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오로 서간(로마 4장; 갈라 3,6-9)은 공교롭게도
같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그가 이사악을 바친 것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인, 의화론의 근거로
바오로 서간을 많이 들었고.
거기에 맞서 가톨릭은 야고보서를 대표적으로 지목했다. 

사실 이제 와서 성경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고찰해보면,
야고보서의 저자도 믿음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제 독서에서도 보여지듯,
교회내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는 행태와 같은
그리스도 신자답지 않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입으로만 고백하는 믿음, 생각으로만 수긍하는 관념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 역시 당시 유다교에 젖어있던 사람들에게
엄격한 율법 준수보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강조했을 뿐이지
실천이 필요없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성경의 대목들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주장의 근거 자료로 삼았다.

그후, 수백년에 걸친 의화논쟁의 피터지는 역사는 새삼 나열할 것도 없다. 

 

...........

가톨릭과 개신교의 오랜 의화 논쟁은 드디어,
그리스도 탄생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커다란 기념비적 발걸음을 내딛는데 성공했다.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두 교회의 대표들이 선언문을 공동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의화 교리에 관해 완전한 일치점을 합의하지는 못했으나
기초진리에 있어서는 일치에 도달한 이 선언문은
'교황청 그리스도교 일치촉진 평의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이 주축으로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1967년에 시작되어
30년 이상이나 지속된 끈질긴 대화의 결실이었다.

16세기에 교회의 분열을 야기시킨 주된 쟁점이었던
교리를 둘러싸고 상대방에게 발했던 단죄를
명시적으로는 취소하지 않고 있고.
또한 교리 사이에 존재하는 상이성을 모두 해소하지 않으면서도,
의화의 기초진리와 관련하여 높은 단계의 일치에 도달하였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미래 교회의 과제인
교회 일치 운동에 기여하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8년 6월 28일에 발표한 논평문을 통해서
"본인은 제이천년기의 끝에 지혜이신 하느님 성령의 선물인
루터교-가톨릭 대화 안에서 이루어진 이 진보가
루터교와 가톨릭 신자들이 노력하는 선언된 목표인
완전한 가시적 일치의 성취를 격려하고 강화하기를 희망합니다.
본인은 이 중대한 전진을 위해 기여한
가톨릭과 루터교 신자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님께 일치를 향한 우리의 길 위에서
우리를 계속 지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마치 다른 주님을 섬기는 종교인양
기독교와 천주교의 두 종교로 일반인에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보며
특별히 대립의 양상이 더 짙게 나타나는 한국의 현실에서

하루 빨리 교회의 일치를 향해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선언문에서 보여지듯, 상대방을 설복시키지 않고서도
상대방의 주장을 서로 서로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할 것 같다.

......................

 

오늘 복음에서도 두 가지의 목숨이 있음을 알려준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렇다.

잃어도 되는 작은 목숨이 있고 얻어야 할 큰 목숨이 있다.
교회에도 큰 목숨과 작은 목숨이 있다.

상대방의 주장과 입장을 생각하며 나의 입장과 주장을 굽히는 것.
그것이 작은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교회의 일치를 이룰 때.
그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든 그리스도교의 분파를 지체로 하는
범 인류적, 초 교파적 교회의 큰 목숨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
더 이상 쪼개져서 서로를 헐뜯고 적대자처럼 여서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올 때" 
하느님의 자녀끼리 손을 맞잡고 그분을 맞이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들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느님이 다른 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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