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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하느님께 누명을 씌우지 말라 !!!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19 조회수623 추천수4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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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불행을 벗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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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복음에서 나병환자를 낫게 하신 후에 한적한 곳으로 피해 가셨던 예수님

께서(마르 1, 40-45 참조) 며칠 후 가파르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집에 머무시고 계셨

는데, 그 소식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오늘의 복음서는 보도합니다

(마르 2, 1 참조). 그 가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연안지방을 돌아다니

며 활동하실 때 임시거주지로 삼으셨던 마을인데, 거기에 예수님의 첫 제자인 어부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충실한 제자 집에 신

세지시면서 활동하셨던 것 갔습니다. 그 집은 이미 우리가 2주 전에 읽었듯이 베드

로의 장모가 예수님께 열병 치유를 받고 그분을 극진히 대접하던 곳입니다(마르 1,

29-31 참조).

그 시몬 베드로의 집은 당시 그 지방의 가난한 어촌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흙벽돌

을 쌓아 지은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널찍하게 방바닥을 만들고 사방의 벽을 흙

벽돌로 쌓아 올린 집입니다. 그 흙벽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서 맨 위는 지붕 형태

가 됩니다. 그 지붕이라야 넓이가 한 평 정도의 굴뚝 같이 생겼는데, 가운데는 구멍

이 생겨서 그 공간을 막대기 몇 개로 가로질러 놓고 거기에 나뭇가지나 갈대 같은 것을 엮어서 덮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쉽게 벗겨낼 수 있는 것이 그 지붕이었습

니다. 그리고 집 밖에서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것이 있어서 필요에 따라

올라가 그 굴뚝같은 지붕을 열어 제킬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 환자를 업고 온 사람들이 많은 인파 때문에 예수님 계신 방안으로 들어갈 수 없

는 것을 보고는 외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 지붕을 걷어내고 예수님 앉으

신 방 안으로 환자를 내려 보낸 것입니다(마르 2, 3-4 참조).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실려 와야만 했던 중풍병자의 모습을 상상해봅시다. 그야

말로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려 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창피함을 무

릅쓰고 예수님께 데려다 달라고 친구들에게 절실한 심정으로 매달렸겠지요.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대전 시내 모처

에 용한 침술가가 있어 그 집 앞 골목에는 매일 새벽 4시경부터 사람들이 수백 명씩 줄을 서서 기다리며 순번에 따라 오후 늦게야 침을 맞을 수 있다는 말을 어느 교우한

테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 침술가는 보건 당국에서 의료행위 자격증을 받은 사람도

아닌데, 소문에 의하면 그분한테 한 10분 정도씩 몇 번 만 침을 맞으면 평생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0분 정도씩 침을 맞으려고 매일 수백 명이

줄서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뿐만이 아니라, 몸에 좋은 것이라면 별의별 짓을 다 해서라도

찾아 나섭니다. 오늘이 마침 우수(雨水)인데 아마 다음 절기인 경칩(驚蟄)까지 산간

계곡의 개구리를 잡아먹으려고 몰려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남아

관광 길에 나선 한국 사람들은 뱀이라든가 별의별 징그러운 것까지 가리지 않고 먹

는다고 합니다. 이렇듯 건강과 장수에 대해서라면 창피함도 마다하지 않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중풍병자도 아마 그러한 한국 사람들 비

슷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그래서 아마 그 사람은 당시 한국에서부터 예수님

을 찾아 간 한국사람 아닌가 하고 우스개 소릴 해볼 만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는 “일어나 들것을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거라.”(마르 2, 11) 말씀이 진정 복음일 것

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라고 보도합니다. 다급하게 병 낫기를 기

대하는 사람에게 오늘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다른 사설을 늘어놓으셨다고 보도

하고 있습니다(마르 2, 5-10 참조). 그렇다면 이 보도는 우리에게 부자연스럽게 느껴

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그 내용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라는

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핵심이랄 수 있는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

언하신 것입니다(마르 2, 5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비난을 받게 됩

니다. 그렇게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오늘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까닭

은 무엇일까요? 천신만고를 제치고 당신을 찾아온 중풍병자에게 엉뚱하게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 5)고 말씀하시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 낫기 위해서 어렵사리 찾아온 사람에게 병 고침보다 먼저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니, 그 중풍병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실제로 우리 교회에도 병 낫기를 기대하며 무슨 기도 모임에 열성적으로 찾아다니

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자들께서는 개신교의 목사님들이 병자들에게

병 낫는 기도를 잘 해준다면서 저 같은 사제도 그리 해야 하지 않느냐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제는 병 치유 자체보다도 고통을 이겨나가도록 하느님께서 인간

의 불행에 동참하신다는 것을 깨우치며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성사를 거행합

다. 그러다 보면 신자들은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사제에게 매우 실망하기도 합니

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에 대해서 그 병자 자신의 반

응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제삼자이며 당대 사회 기득권자들인 율법학자들이 보인

반응을 오늘의 마르코복음서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예수님께 민심이 집

결되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던 기득권자들이 신경질적으로 날카

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의 선언을 하시지

않고 즉시 병을 낫게만 하셨다면 반대자들의 비난을 받으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

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죄 사함의 선언을 하셔서 당신 활동에 걸림돌

을 자초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이 중얼거립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

인가?”(마르 2, 7)

율법학자들의 이러한 비난은 결국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아가기 위한 트집의 근거가

됩니다. 복음서는 이러한 사태를 보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시면

서 진정 인간을 살리러 오신 구세주이심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유다교 율법에 의해서는 중풍병자란 아주 큰 죄를 많이

지은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유다교는 질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가르

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예수님은 당시의 유다교 율법을

정면으로 무시하신 일종의 망발이자 신성모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태도

질병을 하느님의 벌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하느님

으로부터 벌 받았다고 생각하며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을 그 율법에서 해방시켜주

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었다는 복음서의 많

은 보도는 질병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주장하는 그 시대 유다교를 거스르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당대 유다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게 되면서까지 예수님께서는 그 기회를

통하여 인간의 불행이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깨우쳐주십니다. 인간이 병을 얻게 되

고 불행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

서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행을 당할 때 그 원인을 인간들 자신에게서 깨닫고자 하지 않고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든가 운명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

이 불행을 당하도록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신자들은 자녀의 진학이

나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든가 병을 앓게 되면 그 원인을 하느님에게 돌리고 원

망하다가 그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 운

를 바꾸려고도 합니다. 신앙이 고작 그런 것이라면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의 불행을

조장하는 운명의 신(神) 정도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 불행의 원인을 누명 씌우듯이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하느님의 누

명을 벗기시는 분이십니다. 유다교가 인간의 불행에 대하여 율법을 빙자하여 하느

님의 벌이라고 하던 관습을 예수님께서는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병자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전하십니다. 율법이 병자에게 씌운 죄의 굴

레를 벗겨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죄에 대한 벌을 주시기만 하신다는 율법의 잘못된 주장을 물리치시고 동시에 인간

들 자신끼리 서로에게 씌우는 불행의 굴레를 벗겨주시는 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

이시라고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의 탓에 대한 누명을

하느님께 씌우지 말고 인간 자신들이 서로에게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속담을 떠올리게 됩니다. “Nulla pestis est, quae

non homini ab homine nascitur.”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불

행 쳐놓고 사람을 불행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불행이란 인간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서로에게 불행

을 끼얹을 뿐입니다.

 

그것이 죄악입니다. 그러한 죄악을 벗어버리라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전

하시면서, 그 불행했던 인간 그 자신이 자신에게 짐이 되던 것을 스스로 짊어지고 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마르 2, 9)고 말입니다. 인

간들이 서로 굴레 씌우는 것을 벗어버리라는 그 말씀의 뜻을 우리는 다음주일의 복

음에서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다음주일의 마르 2, 13-22 참조).

 

                                             ▒ 윤종관 가브리엘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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