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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2) 네가 만일 왕을 웃긴다면 (전원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22 조회수852 추천수9 반대(0) 신고

 

"네가 만일 왕을 웃긴다면 살고, 웃기지 못한다면 죽어야 한다."

 

이 짤막한 대사 한 마디만 들어도 이 영화의 제목과 장면들을 금방 연상할 수 있겠지요. 영화가 개봉된 지 한 달 반 만에 천만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모은 '왕의 남자'. 이 영화를 온통 긴장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이 한 마디는, 한양 땅에서 연산과 그의 애첩을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이다가 왕을 희롱한 죄로 의금부에 끌려간 남사당패 광대들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선고였습니다.

 

광대 장생과 공길이 뱉어내는 걸쭉한 음담패설, 이를 들은 연산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해괴한 웃음소리- 영화 전반의 내용을 함축해 놓은 듯한 이 장면은 왕 앞에서 삶이냐 죽음이냐를 가름하던 광대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하면서 온갖 음모와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연산 치하의 궁중 속으로 그들을 몰아넣습니다.

 

얼어붙은 듯한 냉기가 도는 숨막히는 권력구조와 폭군 연산의 정신적 병리 현상이 빚어내는 이상한 궁궐 분위기 속에서, 이제 궁중 광대가 된 장생과 공길이가 놀이판을 벌일 때마다 연산의 잠재된 과거의 상처와 권력 주변의 더러운 치부들이 하나씩 들추어집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 밑바닥에 쌓인 더러운 오물을 휘저어 놓듯, 놀이판이 벌어지면 궁궐은 온통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혼탁한 한판 놀이판으로 변하여 마침내는 연산이 휘두르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칼부림으로 마감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 이 영화는, 광대놀이 속에 동성애적 긴장 숨겨진 '게이 로맨스'라 평하기도 하고 정치적 음모와 권력의 허구를 드러내는 심리묘사로 현실정치를 빗댄 영화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화 끝까지 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장생과 공길에게서 보이는 광대들의 삶과 몸짓이었습니다.

 

광대의 삶이란 백정 신분과 다름없는 조선 시대  8천(八賤) 중 하나로, 가장 밑바닥 신분이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떠돌이 자유인이 광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훠이훠이 줄을 타며 걸쭉한 입담으로 현실적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거나,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된 우리들 내면에 억압된 욕망들을 끄집어내어 놀이판의 신명으로 이를 해갈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광대들의 놀이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었고, 그 놀이 안에는 세상의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마음이 짙게 녹아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듯 그들의 놀이판이 벌어지는 곳에는 현실의 모순을 헤집어 놓는 돌개바람이 일어나곤 합니다. 광대들의 자유와 해방의 몸짓은 연산의 모습에 비친 처절한 인생의 허무와 고독, 그 내면에 죽은 어머니에 대한 상처가 깊숙이 잠재되어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비록 픽션이 가미된 영화 속의 이야기이지만, 놀이판이 벌어지는 곳에서 연산이 왜 폭군이 되었는지, 어머니에 대한 모성 콤플렉스가 어떤 행동을 빚어내는지, 치유되지 않은 상처 속에 뒹구는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왕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을 둘러싼 온갖 음모와 관료들의 비리가 광대들의 놀이판을 통해 폭로되는가 하면, 새로운 질서를 알리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키는 회오리 바람의 진원지가 되기도 합니다.

 

뜻하지 않게 궁중 광대가 된 장생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놀이 동반자 공길에게 "너는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라고 묻자 공길은 "당연히 광대지!"하고 맞장구를 칩니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일어나는 궁중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외줄타기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는 장생과 공길이 또다시 광대의 삶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어쩌면 당사자들은 광대의 존재 이유도, 왜 고통스런 광대의 삶을 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혹자는 장생과 공길의 끊을 수 없는 동성애적 사랑 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대의 몸짓과 삶을 통하여 맛보았던 자유와 해방의 삶은 어떤 박해와 멸시, 심지어 죽음조차도 넘어설 수 있는 삶의 강렬한 체험을 선사했을 것입니다.

 

외줄 위에서 펼치는 그들의 춤사위는 더 이상 눈물도 억압도 없는 참된 자유와 평등의 나라, 곧 우리가 이야기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백성들의 갈망이 투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알든 모르든, 사회적 통념과 계급적 질서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의 놀이판은, 평범한 우리들의 눈에는 미친 광대놀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분명 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엮어내고 있는 민중들의 의식을 한발 성장시키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시대의 작은 몸부림으로 비쳐집니다.

 

그들 광대들의 이런 해방의 몸짓은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본 하느님 나라,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고 뒹구는( 이사 65,25) 그 평화의 나라를 죽도록 전하고 싶어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마태 8,20) 떠돌이 삶을 살면서 그분이 뽑은 남사당패(?)를 이끌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해방의 놀이판을 벌이곤 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는 곳마다 제도와 관습에 얽매여 있던 사회에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때론 지도층의 위선과 가식을 폭로하는가 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며,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루카 4,18)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미친 사람이었고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위험한 외줄타기 인생은 공생활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왕과 같은 자주색 용포를 입혀, 시대의 스승이 아니라 멸시받고 조롱받는 광대의 모습으로 꾸며 끌고 다녔습니다. 십자가 위에 걸린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명패가 말해 주듯, 그분은 분명 신분과 제도, 관습을 넘나드는 참된 자유의 광대, 모든 것을 초탈하는 하느님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민중의 한을 대변하여 펼치는 광대들의 춤판은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전하고 싶었던 그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의 참된 광대는 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고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온통 부와 권세를 쫓아 미쳐갈 때 세상을 거슬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미쳐있는 사람이 광대입니다. 보다 좋은 세상, 보다 좋은 교회를 위해 삶의 자리에서 돌개바람을 일으키는 광대들....... 광대들의 이야기를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으로 몰려들 듯,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그런 미친 사람을 보고 싶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말씀지기 주간: 전원 신부님)

 

나도 얼마 전에  <왕의 남자>라는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광대들의 해학적인 입담을 통해 그 시대의 패악을 통렬히 비판하는 영화라고 느꼈지만 위의 글을 쓰신 신부님처럼 예수님에게 연결하는 묵상까지는 미처 생각못했습니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 역시 신부님은 다르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의 글은 (말씀지기) 주간이시며 명동가톨릭회관 통합사목연구소에 계신 전원 신부님께서 말씀지기 3,4월호 편집자 레터에 쓰신 전문(全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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