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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50) 왕의 남자 & 투사부 일체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3-01 조회수735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3월1일 재의 수요일 ㅡ요엘2, 12-18; 코린토5,20-6-2;마태오6,1-6.16-18ㅡ

 

       왕의 남자 & 투사부 일체

                                    이순의

 

 

여론이 들썩 들썩 하고, 이 시대의 표징이 어떻게 반추 되었기에 소란스러운지 궁금해졌다. 자식놈 학비 대랴, 새옷이라도 한 벌 장만해 주랴, 부모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도 영화를 보았다. 짝궁이 장사치라서 떠도는 덕에 손전화기를 많이 사용하는 은혜(?)로 1년에 몇 편의 영화는 공짜(?)로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호사를 누렸다. 머리털을 자가 탁발 하는 날이나 주간이면 그 비용을 아낀 공으로 영화를 꼭 본다는 원칙을 세워서 잘 지켰는데....... 근자에는 머리털 탁발은 고사하고 전화기 회사에서 주는 영화도 다 못 보고 지난 해가 갔다. 자식놈이 입시생인 원인이 컸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오랜만에 대하는 은막이었을 것인가?!

 

간단하게 설명을 한다면 왕의 남자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그 색감에 완전히 뿅~! 가버리고 말았다. 색종이를 좋아하는 나의 성격상 우리의 전통 문양을 가진 그 엄청난 색들을 끌어들여 은막의 잔치에 펼쳐 놓았다는 사실이 황홀했다. 영화의 질을 떠나서 대단한 완성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민초들의 설음을 담아낸 색들의 어울림은 대조적이면서도 강렬하여 그 짙은 인고의 갈등들을 아낌없이 표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투사부 일체는 아들녀석이 얼마나 재미있다고 요란을 떠는 바람에 일부러 가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가서 보았다. 역시 간단하게 그 느낌을 요약한다면 건달세계에도 물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물이 든 사무라이라든지, 대표적인 인물 김두한을 연상하는 주먹 세계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전환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돈이라는 명제가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들을 흡수하면서 예전의 선비는 찾아 보기조차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이 많으면 신분이 보장되는 시대! 어쩌면 투사부 일체는 돈과 힘을 앞세워 다음 세대의 새로운 지식인들이 주먹세계에서 활동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스런 예견을 해 보았다.

 

그런데 두 작품 모두 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른 생각들이 분분하다. 왕의 남자는 호머리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서 영화 중의 쓰레기라고 말하는 단호한 비판도 있고, 투사부 일체는 어줍잖은 건달들의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로 청소년들을 호도하는 저질이라고 격하시키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작품성이나 관객면에서 어떻게 왕의 남자와 투사부 일체를 동급에 놓느냐고 격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모양이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듯이, 이건희 회장처럼 탄생부터 신분이 보장되는 사람도 있고, 노무현 대통령처럼 대학교도 못 다녔어도 대통령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영화도 이런 영화도 있고 저런 영화도 있지를 않겠는가?! 다만 두 영화가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한 시대에 만들어져서 동시에 상영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분명히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시대는 다르다. 그러나 엄밀히 들어가 보면 두 영화는 매우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공통소재를 다루고 있다. 첫째 시대의 고발. 둘째 가진자의 추행. 셋째 약자의 아픔! 이렇게 크게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임금이 임금 답지 못할때 광대의 몸짓은 슬픔이다. 공길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결코 왕의 남자라는 영화는 호머니스트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의 본분대로 따라 사는 사람의 신분인 광대! 서로 의지하고 보둠어 주지 않으면 세상의 노리개 감이 되어 패거리들에게 죽 한 끼 조차 제공 할 수도 제공 받을 수도 없는 천하디 천한 인생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숙명에 거절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이 대물림 해 온 살이였고, 정신이었던 것이다. 굳이 그 살이를 변통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광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프면 슬픈 신명을 담고, 즐거우면 재미난 신명을 놀고, 배고프면 그 신명으로 떠돌아 밥을 얻고, 가는 길목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신명을 전하고 다니는! 모든 인생 여정에 타당한 신명을 담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광대의 길 뿐이라는 것을 운명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처럼 가무를 불러다 놀아야 할 이유도 없었고, 화가 난다고 누구를 처단해야 하는 운명은 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공길의 몸짓은 슬펐던 것이다. 결코 공길은 왕과도 장생과도 동성애를 즐길 줄 아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광대의 가슴을 살 줄 아는 진정한 광대였다. 광대 다운 광대였더라는 말이다. 광대의 가장 큰 행복은 어떠한 처지에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언제나 신명을 살고 누구에게나 신명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길 자신이 살 줄 아는 광대인 것이다.

 

왕의 남자에서도 가진자들의 추행은 광대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투사부 일체가 구체화 하고 있는 원조 교제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다. 계급사회가 구체적이거나 물질의 소유가 한정적이었던 옛 시대에는 인간의 모순 또한 한정적이거나 비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황금보다도 지니기 쉬운 돈의 힘은 인간의 본성을 한정적으로 차단하거나 비밀스럽게 하지 못하고 있다. 가진자들의 물욕은 이 시대의 어떤 권력이나 막강한 지식을 동원하더라도 제동이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인간의 기초질서 앞에서 돈의 힘은 약자를 더 약자로 몰아 넣고야 말았다. 여기서 투사부 일체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내가 듣고 알고 있는 형님들의 근성은 오히려 돈을 따라서라면 못하는 일이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형님이신 계두식을 교생 선생님으로 학교에 보내 그 안에서 발견되는 가진자들의 추행을 격고 당하고 밝혀가는 것이고, 둘째는 형님들께서 학교 이사장으로 부터 당하는 원조 여학생을 돕고 그 비리의 원흉을 척결하는 모습을 주먹으로 연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실체는 허구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대단한 재미는 돈이라는 철옹성을 건달들의 주먹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이 막힌 심장을 화~악! 뚫어 준다. 정말로 영화처럼 인간의 추행을 저렇게 라도 다스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명쾌할 것인가?! 이 시대를 고발하는 허구의 영화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만족이었다.

 

왕의 남자와 투사부 일체는 결국 강자들의 몰락이다. 권력과 광대! 돈과 주먹! 권력과 돈은 지금 오늘 이 시간에도 누구나 추구하며 노력하는 목표물이다. 반면에 광대와 주먹은 권력을 얻고 돈을 지닐 수 있는 수단의 도구는 될 수 있으나 권력만큼 돈 만큼 인정받지는 않는다. 권력과 돈을 지닐 수 있다면 광대도 할 수 있고 건달도 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옛날처럼 타고난 신분이 곧 권력이고 돈인 시대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면 권력과 돈은 얻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등불 밝혀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모든 사람의 염원이다. 그러나 체감하는 현실은 돈 앞에서라면 광대와 건달 뿐만 아니라 교육 조차도 비굴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이 꽉 막힌 이 시대의 심장을 달구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이 나라의 모습은 지금 모두가 신분이 상승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륙도니 사오정이니 삼팔육이니 이태백이니, 원조 교재라느니 어린이 성추행이라느니, 사람의 가슴으로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언어들이 생겨 난 것을 보면 신분 상승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의 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권력을 보고 눈물 흐를 줄 아는 광대 공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이며, 이런 시대에 약자를 일으켜 주는 건달 큰 형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배 고프고 서럽고 천한 광대로 돌아갈 권력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이며, 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고 배움에 자본을 투자하는 건달 세계라면 이 사회가 얼마나 빛이 날 것인가?! 나는 두 영화를 보면서 그 공통적 안건들로 나의 심장을 확 뚫고 왔다. 다만 왕의 남자를 연극으로 한 번 더 보려고 했던 이유는 양장과 양복에 길들여져 사는 나의 영혼에 색의 본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과연 연극에서는 어떻게 다르게 연출을 했을까도 궁금했지만 조명과 무대장치가 생동하는 무대의 색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공연은 모두 매진이었다.

 

오늘은 유관순 언니가 독립운동을 한 기념일이기도 하지만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나는 미사에 참례하여 재를 받았다. 새로운 지향도 세우고, 새로운 실천목표도 세웠다. 신분 상승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더 무거운 무엇이 가슴을 빼앗아버린 이 시대에 나는 내가 믿는 신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만 한다. 광대 공길이라는 주인공! 깡패 계두식이라는 주인공! 그들도 나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멋이 있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만족이었다. 나의 가난, 나의 아픔, 나의 시련, 나의 희망, 나의 기쁨, 나의 행복, 이 모든 것을 지향하고 얻을 수 있는 근본은 주님뿐이지 않겠는가?! 새로운 부활을 준비할 것이다. 또 다시 광대로 살아도 행복한 공길처럼 또 다시 내가 이대로 살아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간구하는 바가 주님 안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ㅡ아멘!ㅡ

 

ㅡ"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마태오6,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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