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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화해하여라'/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3-09 조회수537 추천수4 반대(0) 신고

<화해하여라>(마태 5,20-26)

 

 그러므로 네가 제단 위에서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거기에서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 * * *

 

 우리는 어제"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을 들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즉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말은 율법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진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 그러므로.....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는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는 말씀이시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율법에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만 알려주었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가르침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살인을 하였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즉 완성시키신다.

 

 살인이라는 것이 단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정말 어떤 것이 살인을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율법만 지키는 사람이라면 형제에게 어떤 성을 내든 또는 어떤 모욕적인 말을 하든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다. 살인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단순히 생명을 앗아가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라고 멸시하고 '멍청이!'라고 욕하는 것도 살인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은 외형적인 살인이라면 말로 짓는 모욕과 멸시는 정신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살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멀쩡한 사람을 "바보! 멍청이!"라고 한다면 "사람잡네"라고 말한다. 우리가 형제에게 성을 내고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살인과 같다는 것이다. 이로서 단순히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지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심으로써 "살인해서는 안된다"라는 율법의 의미를 완성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말로서 형제에게 살인을 하였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즉 "네가 제단 위에서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 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화해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이 생각나거든 물러 가서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거기에서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화해를 청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형제에 대해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내가 먼저 그에게 가서 화해를 청하라는 것이다.

 

 나는 비록 그 형제에 대해서 아무런 원망을 품고 있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화해를 청하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상대방에게 잘못했는지 또 형제가 왜 나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무조건 화해를 청해야 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르더라도 어떤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대화중에 아니면 무의식 중에 내가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모욕적인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형제가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런 빌미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면 화해를 청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논리가 일반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더군다나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내가 살인을 하지 안 했으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멸시하거나 멍청이!" 라고 욕하는 것도 일종의 살인행위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상대방이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날 때 나에게 와서 용서를 청하면 내가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는 아무 관계없이 내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무조건 내가 먼저 가서 화해를 청하라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계명이 얼마나 혁신적인 가를 알 수 있고 우리들의 행동이나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조심스러운 가를 생각하게 한다. 한마디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 자신의 생활에는 아주 철저하고 남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베풀어야 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새로운 삶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냥 적당히 살면되지 않는가? 

사람이 무엇을 지향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자세도 달라진다. 단순히 자기 건강 관리를 위해서 운동을 하는 사람은 무리하지 않고 적당히 운동을 하면 된다. 그러나 세계 참피온이 되려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면 적당히 운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보다도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결코 챔피온이 될 수 없고 그 자리를 유지할 수도 없다.

 

 보라! 월드컵에서 우승 후보로 지목되었던 국가들이 예선전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 것을. 실력이 부족하면 떨어지는 것이 운동하는 세계의 원칙이다.


 

 오늘 복음은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한가지 잣대가 있다. 그 잣대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실천하고 따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의지이다. 그 의로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앞에서 말씀하신 진복팔단이다.

 

 그리고 진복팔단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의롭게 사는 삶이다.  진복팔단은 우리 신앙인의 삶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즉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삶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일반인들과는 달라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1)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즉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는 것이나 모욕적인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사랑의 행위이다. 사랑의 행위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율법을 완성하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유광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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