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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제의 일기]* 봉 헌 [#15772]............... 이창덕 신부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3-12 조회수657 추천수8 반대(0) 신고

봉  헌

 

 

이제 난 또 봉헌 되어야 한다.

누적된 분노와 가면을 썼다가는 벗는 고달픔에서

발가벗겨진  아기 예수님의 봉헌 되는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을 투시하여

죄인인 채 봉헌 되기를 간원하는 삶을 이어야만 한다.

 

도리질도 기쁘게 끄덕여야하는 순명에서부터

한 치의 발도 옆으로 디딜 수 없는 서원의 의식에

엎드려야 한다.

 

억겁으로부터 흐르는 진리의 그 둔덕에 엎드리면

가슴에 스며들어 들려오는 님의 부르심이 있다....

난 내 영혼을  통해 부르심을 받고

귀기울여 응답하는 숨결이 고르지 못하였어도

또 봉헌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

 

이제 말씀을 뿌리고

그 말씀은 발아된다.

내 사지는 그 가지가 되어 무성한 잎의 그늘을 장만하면

뭇 새 깃을 접었다가..

떠나버린다.

 

아픔과 조갈에 비척이던 순례자는

내 그늘 아래서

주님의 사랑을 읖조리며 쉬다가

피곤의 덩어리를 털고 떠나간다.

 

차츰 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 뜸해지면서

사랑의 가슴 식힐 여지도 없이

추위에 앙상한 가지 휘저어 온몸을 떨며 서 있어야 한다.

이것도 하나의 봉헌이라는 것을 믿기까지는....

수없는 슬픔을 삼키고 나서야였다.

 

주님께 정복당한 노예되어

사랑의 채찍을 상속받아 

평생을 지내온 자국마저 남몰래 지워내야 하는 것도,

인고의 쓴 잔을 주님따라 달게 마셔야 하는 것도

불휴의 염원이었으니

항거 할 수 없는 존재임에...

슬픔을 삼키고 기쁨을 토해내야 한다.

 

   여미고 추스려도

   터지고 내려앉는 마음

   어디서든 눈감으면

   잇닿을 듯 님의 숨결

   치솟아 잡으면

   창가에 시린 손끝

 

이제 감당하지 못할 희구와 열모(熱慕)는

세월에 씻기고 바래지다가

쪼개지며 삶이 마무리되는 순간

한 사제로서의 봉헌의식도 마무리 되는 것이다.

 

난 얼마전,

암의 진단을 받고.. 병실로 돌아와

지난 날의 사제 생활과 

마무리지어야 할 사제 생활의 선(線)을 원(圓)으로 긋고

그 안에 쪼그려 앉아 이런 일기를 썼다

 

주홍빛으로 채염된 머리를 지켜볼 기회가 있다면

난 황혼이라 하지 않고 저녁 노을이라 하겠다.

어둠의 골짜기 그 미로에서

미소를 걸머졌던 가혹한 십자가를 내려놓고

진땀 씻어내리며..

광명의 길에 들어서는 소망을 짊어져야 한다.

 

난 이제껏,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 가르쳐왔지.

가르친 대로 의연히 실천하자.

이제 수의를 깁는 마음으로 겸허히 지난 날을 회상한다.

 

40년 동안 믿음과 소망의 저울에 사랑의 추를 달고

희생을 저울질하던 이땅에서

하늘을 향해

남김없이 연소될 말씀을 올려본다.

 

'울며 왔다가 웃으며 갑니다.'

 

제단에 엎디어

나를 봉헌하기 위해 감쌌던 제의 자락을 날개로 하여

묵언의 의탁으로

주님의 숨소리를 들으려 날아가련다.

 

인간 연민의 수렁을 건너 좌절과 절망의 언덕을 날아

사제의 삶에서 길어 올리던 헌신이 가납되도록 두 손 모으면

주님은 내 두 눈 고이 덮어 주시리라 믿는다.

그때 들리는 소리

 

   "기쁨이 비례가 됨을

   안간힘 써가며 증거했으니

   네 봉헌 내 기꺼이 받으리라."

 

주의 봉헌,

그 뒤를 따르는 주님과의 사랑은 아플수록 곱게 피어나고

이를 증거하기 위해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뒤척이던 뒤안길을....

지워가며 살아간다.

 

스스로 품었던 인간적 번뇌를 떨쳐내고

한 고비, 두 고비, 몇 고비를 반 고비로 넘으며

여기서 생기는 사랑의 상흔(傷痕)을 봉헌하는 기쁨으로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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