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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6-03-16 조회수687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3.16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17,5-10 루가16,19-31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이,
진정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상의 아브라함이 어떤 부자를 향한,
아침기도 시 즈가리야의 후렴 말씀이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 같습니다.

 

“너는 살아있을 동안에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지만,
라자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가16,25).”

 

과연 우리들은 어느 쪽에 해당됩니까?
어떤 부자 쪽입니까?
가난한 라자로 쪽입니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번쩍 눈에 들어온 다음 사실입니다.

어떤 부자는 익명으로 이름이 없었지만,
어떤 부자 집 대문 앞의 걸인은 라자로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 엘레아자르의 음역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우시다’라는 뜻으로 참 의미심장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하느님이 도우신다는
성서의 사상이 스며들어 있는 이름입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부(富)의 감옥 속에 갇혀 자족하며 살다보니
하느님을 잊었고 나도 잊었습니다.

 

반면 하느님이 도우신다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는
종기투성이 몸으로 그의 집 대문 앞에 누워있었다 합니다.

 

과연 누가 내적으로 진정 부자요 가난한 자인지 묻게 됩니다.

1독서의 말씀대로 마음이 주님께 멀리 떠난 어떤 부자,
내적으로는 메마른 광야, 인적 없는 소금 땅처럼
황량한 마음의 가난한 자 아니었겠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반대로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둔 가난한 라자로,
마치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내면은 늘 푸른 넉넉한 마음 부자 아니었겠나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의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넉넉한 내면의 하느님의 가난한 자되어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자들은 하느님 나라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문제는 어떤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와의 단절입니다.

아주 가까이 살았지만 완전히 무관함 속에,
어찌 보면 ‘구원의 문’과도 같은 라자로를 까맣게 잊고 산 것이
어떤 부자에게는 치명적 잘못이었습니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게 무관심, 무관계의 단절의 삶입니다.

하느님 보내신 구원의 표지가 바로 라자로였는 데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가16,26).”

 

바로 살아생전, 하느님과 어떤 부자, 어떤 부자와 라자로,
둘 사이의 단절의 골이 죽어서도 계속 연장되고 있음을 봅니다.


진작 살아생전에 어떤 부자,
사랑의 나눔으로 이 둘 사이에 다리를 놓아 길을 터놓았더라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천상적 삶을 살았을 텐데 말입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하느님 보내신 가난한 라자로는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이 복된 미사시간

좋으신 주님은 당신께 신뢰를 둔 마음 가난한 우리 모두에게

당신 은총으로

주님과 우리와의 단절의 큰 구렁을,

형제들 서로간의 단절의 큰 구렁을 메워주십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여라(시편40,5r)."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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