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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성인에게 만드러 준 명함(名銜)- 박상대신부 / 퍼온 글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3-20 조회수541 추천수5 반대(0) 신고
요셉 성인에게 만들어 준 명함(名銜)

 

  한창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교회가 오늘 하루만큼은 사순시기를 중단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요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 성인을 크게 경축한다. 요셉 성인에 관한 성서상의 기록은 복음서의 전사(前史)에 속하는 마태오복음 1-2장, 루가복음 1-2장에서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보도된 내용이 전부이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마태 1,16)이었으나, 다윗의 고을인 유다지방 베들레헴에서 살지 않고 갈릴래아지방 나자렛에서 살았던 것(루가 2,4)으로 추정된다. 이곳 나자렛에서 목수 직업을 가졌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 즉 법대로 사는 사람(마태 1,19)으로 이미 세간(世間)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그녀와 파혼하지 말라는 천사의 명을 받들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구조사령 때문에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서 예수를 낳게 된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목동들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 헤로데 대왕의 무죄한 영아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에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나자렛으로 와서 살았다. 요셉은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다. 예수가 12세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잃어버렸다가, 학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아들을 찾기도 하였다.

여기까지가 전사(前史)가 보도하는 내용이다. 그후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이고 목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고향방문 때 그곳 사람들의 입으로 증언된다.(마태 13,55; 마르 6,3; 루가 4,22)

 

  기원후 2세기경에 예수의 형제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편집한, 그러나 위경(僞經)에 해당하는 《야고보 복음서》에는 요셉과 마리아, 안나와 요아킴, 그리고 예수의 소위 ’잃어버린 시절’(12살~30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많다. 야고보복음서에 따르면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할 때 이미 80세의 고령이었고 이미 결혼한 경험이 있어 슬하에 야고보, 유다, 시몬, 미리암 등의 자식들을 둔 것으로(마태 13,55) 전해진다. 야고보복음서의 이러한 내용은 초기 교회가 직면한 일련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당시 중대한 신학적 문제들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과 천주의 모친성,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잉태, 예수의 신성(神性)등을 손꼽을 수 있다. 야고보복음은 어디까지나 위경(僞經)에 속하기 때문에 그 내용의 역사성과 진실성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정경(正經)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원래 그는 가장자리에 서 있고, 그림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가운데서도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내리는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으며, 보여주는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이것이 요셉의 법칙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입을 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에 관한 성서적 근거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탄생예고부터 12살까지로 한정된다. 그러나 그 어느 부분에도 요셉 스스로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요셉은 그저 침묵으로 등장하며, 그저 마음먹는 것뿐이다. 성서저자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가의 의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서상 말하지 못하는 요셉의 답답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이 없는 자의 마음은 크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주어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넉넉한 마음 때문이다. 넉넉한 마음은 때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없는 요셉에게 사람들은 명함(名銜)을 만들어 주었다. 그 명함을 나는 보았다. 명함에 나타난 직함은 이렇다: ’임종자의 수호자’, ’노동자의 수호자’, ’가정의 수호자’, 게다가 비오 9세는 1870년 ’교회의 수호자’라는 직함까지 내렸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분의 배필 성 요셉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정했다. 말로써 주장을 펴지도 못하는 요셉이 왜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교도직이 신앙의 유산을 수호하기 위하여 줄곧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수많은 사상적 침입으로부터 신앙을 보존하고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교권은 신앙을 수호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빚어냈다. 논쟁을 벌이고 이단자를 파문하고, 심지어는 종교재판을 통하여 사람까지 죽였다. 요셉이 바로 이런 교회의 수호자라 말인가? 아니다. 요셉은 그렇지 않다. 요셉은 그저 ’수호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마리아는 요셉이 모르는 사이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요셉은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마음을 고쳐먹는다. 결국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잣대로 파혼을 결심하지만, 금방 그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잣대로 사건을 바라본다.

그 바라봄의 결론은 받아들임이다.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를 수호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요셉을 교회, 노동자, 임종자, 가정의 수호자로 칭송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든 것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고 수호할 수 있는 은총을 요셉성인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구해야 하겠다.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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