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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불 공주<1>,<2> / 신원식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3-20 조회수824 추천수9 반대(0) 신고

이불공주<1> 과 <2> 를 합쳐 놓았습니다.

 

이불공주<1>

 

3월 19일 (일)요일 (요한 2, 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19절)

 

가톨릭 출판사에서 있었던 가르멜 동정녀회 주관의 관상피정 중의 신원식 신부님의 강론 말씀입니다.

 

얼마전에 TV에서 토요일 저녁마다 하는 프로그램에서 "우리 아이가 이렇게 달라졌어요." 라는 작은 제목중에 '이불 공주' 라는 프로를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나온 여아의 별명이 이불 공주인데 왜 이불공주인가? 

 

그 여자 아이는 24시간 그 이불을 옆에 끼고 다닙니다. 그게 있어야 마음이 안심이 되고 없으면 난리가 납니다. 그 이불과 똑같이 만들어 놓아도 가짜는 금방 알아냅니다. 냄새로 아는 것입니다. 제 조카도 어렸을 때 이와 유사한 행동을 보였는데 왜 그랬는지 몰랐다가 이 프로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아이의 목숨 만큼 중요합니다. 이불을 빼앗기면 새파랗게 죽어갑니다. 이불을 빨 때는 대체용 이불을 주는데 빨래를 하고 나면 바로 그 이불을 손에 쥐어 주어야 합니다.

 

어른들 생각에는 "뭐가 그리 중요한가?"... 하지만 아이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하고 그 이불이 없으면 불안해 합니다. 그 아이에게 이불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 원인은 엄마의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이 그 엄마의 사랑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 이불이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의 사랑을 대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알고 엄마와 아빠가 사랑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불에 대해 깜박깜박 잊다가 나중에는 이불의 존재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 버립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가 모두 이불자락을 한 자락씩 끼고 사는구나! 어른들이 볼때는 불쌍하고 바보같이 느끼지만 우리도 한 자락씩 끼고 살고, 여러 자락 끼고 살 수도 있고, 그 이불이 없으면 뒤집어 집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듯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가득차면 우리가 끼고 살던 이불은 까맣게 잊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이불자락을 끼고 사는지? 돈, 돈이 없으면 자살하고, 죽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이불이 없으면 죽는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제가 예수회의 수도회에 입회한 것이 20년 전 2월 20일입니다. 어제 청양에서 동기생 6명이 다 모였는데 미사를 같이 하면서 다들 훌쩍 훌쩍 울었습니다. 잘 살았든 못 살았든 20년을 살았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미사를 같이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이 저한테는 "네 성전을 허물어라, 네 성전이 허물어져야한다." 그렇게 다가온다고... 

 

유다인에게는 성전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만 있고 지방에 있는 것은 회랑이라고 합니다. 성전을 크고 아름답게 지었고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생각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은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온갖 장사꾼들로 쌓여 있었습니다. 성전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정말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고 사람을 속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성전을 세우신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성전이 절대적인 것이고 무너지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 때 지은 것이 한 번 무너지고 그 후에 다시 한 번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그 성전이 바벨탑처럼 되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사람을 속박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성전,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구원을 청하는 성전이 사람을 속박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종교나 신앙이든지 사랑이 배제되면 이데오르기나 신념에 불과합니다.

 

그 율법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끊임 없이 사람을 압박하는 도구가 되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고 새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같은 동료 신부님들과 미사를 드리면서 나눈 것은 내가 20년간 수도 생활하고 사제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성전을 허문 작업이었습니다.

 

이불공주 <2>

 

 "이것이 없으면 절대로 안된다" 라는 것, 그것이 허물어 지면서 새로운 삶, 기쁨, 의미가 있는 것을 여러번 체험하였습니다. 제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아버님이 지금의 제 나이(40대 중반)와 같으셨을 때입니다. "인간이 40 이 되면 무슨 재미로 살까?" 라며 참 불쌍하게 생각했습니다. 

 

저한테는 40대가 황금기입니다. 그 때는 내가 10 년만 젊었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그런데 어느 순간에 두 번 다시 그런 생각을 안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40 대가 너무 편하고 행복하고 좋습니다.

 

20대 때에는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가 쌓은 성벽이 높았습니다. 담벼락이 높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높이 쌓으면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지금은 도둑 맞을 것도 없고 아주 편합니다.

 

성전을 46 해나 허물면서 살아 왔구나! 지금 제가 마흔 여섯이거든요. 지금까지 허물면서 살아 왔구나!

 

우리가 냉철하게 우리 삶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필사적으로 이불자락을 붙들고 있을 것입니다. 성전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성벽을 견고히 쌓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스스로가 이불자락을 놓을 수도 성벽을 허물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내 이불자락을 빼앗아 가실 것입니다. 성벽의 두꺼운 벽을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 가실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이불자락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필사적으로 그 이불자락을 붙들고 있었던 그 아이처럼 새파랗게 죽어갈 것입니다.

 

그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불자락, 내가 쌓아온 두터운 성전의 벽이 무너질 때 하느님께서 새로운 성전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야말로 " 왜 내 삶에서 내 이불자락을 빼앗아 가고 있는가? 왜 내 성벽을 허무는가?" 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맡기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여기십시오.

 

우리가 절대로 놓지 못하는 이불자락, 성벽도 언젠가는 허물어 집니다. 우리의 목숨이지요. 죽을 때에 허물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 마지막 이불자락, 육신과 생명이 허물어지고 그 마지막 이불자락이 허물어질 수 있도록, 놓을 수 있도록, 받아드릴 수 있도록 연습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은총의 체험을 했으면 합니다.

 

이불자락이 한자락씩 빠져나갈 때마다, 성벽이 하나씩 허물어질 때마다 마지막 이불자락이 빠져 나갈 때 그것을 편안히 놓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어떤 이불자락을 잡고 있는지? 어떤 성벽을 쌓고 있는지 바라봅시다. 두렵지만 하느님께 맡기는 연습을 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이불자락을 보면 힘듭니다. 성전이 허물어져가는 벽만 보면 너무나 절망적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바라보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향하면 그것들이 없어도 이불자락이 없어도 성전의 벽이 허물어져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안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이불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는 여유와 통찰력이 있어야겠습니다. 그것을 위해 끊임 없이 하느님께 기도하고 이불자락을 놓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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