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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 [박상대신부]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3-21 조회수801 추천수5 반대(0) 신고
  ***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마태오는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에 이어 공동체설교(18장)를 엮었다. 예수께서는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 간의 공동체는 물론이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공동체 안에 지켜져야 할 규범들을 제시하신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엮어진 공동체규범에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형제가 잘못하면 타일러주어라’는 등 온통 ‘서로간의 자비로운 사랑의 법칙’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으로서 공동체설교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결론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는 것이다. 이 말씀을 7곱하기 70해서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규범의 진정한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비유를 살펴보자. 마태오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비유 속에 언급된 채무금액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종이 왕에게 빚진 금액은 일만 달란트였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데나리온(마태 20,2)인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이 안식일만 빼고 20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따라서 1만 달란트의 빚이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다. 왕은 종의 이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다.

 

반면 다른 종이 이 종에게 진 빚은 100 데나리온이었다. 이 금액도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왕이 탕감해준 1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 된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니 그 종이 다른 종의 100 데나리온을 탕감하는 일이 권리에 속하겠는가? 아니면 당연한 의무에 속하겠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비유의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탕감 받은 일과 탕감하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이웃에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에서 빚진 돈을 ’죄’로, 탕감을 ’용서’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용서함은 용서받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비유 속에 등장하는 왕이 빚진 종에게 행한 것처럼 우리에게 하실 것’(35절)이므로 먼저 용서를 베풀라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받기 위해 용서해야 하는 것은 용서가 권리이기보다 용서받기 위한 조건, 또는 의무라는 점이 강조된다.

 

  용서가 의무라는 점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스스로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과시하면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예수님의 대답 속에는 용서의 무한정과 함께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가 의무로서,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제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들 일상체험은 무조건적이고 무한정의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때로는 거의 불가능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용서를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용서를 놓고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에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적어도 용서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용서는 결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인 것이다.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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