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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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약하게 태어난 우리는 감사합니다 / 김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16 조회수746 추천수17 반대(0) 신고

어제는 오랫만에 대녀인 딸의 친구가 놀러 왔습니다. 몸과 마음이 예쁜 그녀는 아브라함의 동생인 요셉의 머리도 잘라주고... 딸의 친구라서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사이였지만, 온 라인 상에서 제가 활동하던 카페에서 글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입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의 가족 전부가 입교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묵상방에 글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선교입니다. "다 신자일텐데 무슨 선교냐?" 라고 하시겠지만 우선 제가 가장 큰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고, 서로의 글을 통해 우리 주님께 대한 믿음을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장이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주님을 배반한 아픔과 실의에 빠져있었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굳건한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병도 고쳐주고 입교를 시키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참되고 굳건하게 믿을 수 있도록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곳으로 자리 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대녀와 막내 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계획에 없었던 것이었지만 수도원으로 부활 성야 미사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니스트 수도회의 김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미사 강론 말씀이 좋아서 옮겨봅니다. 제대로 메모를 하지 못해서 빠진 부분도 더러 있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분노와 사랑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분노와 사랑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분노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카톨릭의 성인도 분노를 느꼈습니다. 분노, 인간이 왜 분노를 느낄까?

 

분노의 근원적인 원인은 한마디로 무능력입니다. 국회의원들이 혈세를 낭비하면 때려주고 싶습니다. 나에게 힘이 없으니까... 바람피는 남편을 때려 주고 싶습니다. 나에게 힘이 없으니까...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 나가지 못해서 분노를 느낍니다.

 

드라마를 보면 능력이 없어서 사랑을 빼앗깁니다. 분노는 이처럼 내가 무능력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예수님처럼 넓은 마음을 소유하면 분노를 많이 느끼지 않습니다.

 

가지지 못한자나 가진자나 누구나 분노를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던 진시황제도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가 느꼈던 분노의 대상은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의 무능력을 가장 비참하게 드러내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분노의 원천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죽음에 대해 두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죽은 다음에 우리는 모른다" 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세상에서 무서운 말이고, 그가 젊었을 때 한 말일 것입니다. 막상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는 그도 삶의 한가운데에 죽음이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태어났을 때도 그렇듯이 죽을 때도 죽음은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내 의지대로 안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입니다. 시키는대로 해야지 버틸수록 비참해집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이지만 처음부터 사라져야 할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입니다.

 

죽음, 사실 저한테도 두렵습니다. 이제 이 나이에 못 버릴 것도 없지만 아무도 같이 갈 수 없고, 혼자서 가기에 두렵습니다. 죽음이 두렵고 무서운 것은 평생을 함께 한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이 길에 함께 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분노의 대상은 바로 창조주 하느님입니다.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가장 큰 분노를 느낍니다. 길어야 80인 인생, 그러면 왜 창조했는가? 여기에 인간의 분노가 극에 달합니다.

 

바벨탑은 신이 되어서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분노의 표현입니다. 결국 사라져야 할 인생에 대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창조한 신을 죽여야 조금 위로를 받을 것 같았습니다. "신은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라..." 게다가 신은 먹고 자고 즐기는 것을 좋아 하도록 그렇게 창조해 놓고, 죄인으로 여기니...너무 많은 죄에 억눌려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질 속죄양이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에 당신을 맡깁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인생의 고뇌를 맛보시고, 어린양으로 오셔서 죽음의 어두움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제 우리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창조주를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허무합니다. 신을 죽이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아닙니다. 우리의 착각이었습니다.

 

신이 되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는 것,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 복된죄여, 너로 인해 그리스도를 얻었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죄, 아담이 지은 죄때문에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약하게 창조된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철학자 가브리엘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것은 "너는 결코 죽지 죽지 않으리라." 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너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입니다.

 

젖을 빠는 아가가 엄마의 눈을 봅니다. 엄마는 아가를 보고 "사랑한다. 엄마가 지켜줄께. 끝까지. 만약 무슨일이 일어난다면 엄마가 대신 죽을께. 엄마의 마음속에서 엄마의 영혼안에서 너는 영원히 살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는 영원히 살 것이다."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공포에 가깝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기에 인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고 에제키엘서에서 말씀하십니다. 첫사랑을 잊을 수 없듯이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못하십니다. 하느님의 첫사랑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 하나가 풀립니다. 그리스도가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고통받고 유혹 받으셨기에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열렬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무엇보다 약하게 태어난 우리는 감사하다고 말씀하십시오.

인간의 운명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었음을 이 미사중에 깊게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사끝에 "정작 내 주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보다 실천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추상적으로 "아! 사랑이지(쥐)" 가 아니라 무엇보다 실천입니다." 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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