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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울고 있느냐?'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16 조회수529 추천수6 반대(0) 신고

<왜 울고 있느냐?>(요한 20,1-2.11-18)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하고 물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그분이 예수인줄은 미처 몰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천사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이 물음에 잠시 머물자. 마리아만 울고 있는가? 우리 주위에는 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려서 울고, 직장에서 쫓겨나서 울고, 남편에게 매를 맞아서 울고, 시험에 불합격해서 울고, 경기에 져서 운다.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울고,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암 진단을 받고 운다. 분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화가 나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아파서 울고, 너무 기뻐서 운다. 아무튼 우리  주위에는 우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렇지만 우는 이유는 모두 다르다. 나도 울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아니 우리가 울면 예수님도 우신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 왜 울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우리가 울고 있다면 왜 우는가? 주위 사람들이 울고 있다면 그들은 또 왜 우는가? 내가 상대방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지는 않았는가?  나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간디는 "나는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간디만이 아니라 우리 도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 오늘 나의 노력으로 단 한 사람이라도 우는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럼 마리아의 눈물은 무슨 눈물일까? 마리아는 그 이유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마리아의 눈물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데에서 나오는 눈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물은 아마도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렸을 때에 나오는 눈물일 것이다. 더군다나 애인의 흔적조차 찾을 길 없을 때 오는 슬픔은 아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리아의 눈물이 얼마나 애처롭고 아픈 슬픔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의 눈물과 오늘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요한은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가?

요한은 자기 복음에서 처음부터 던지고 있는 질문이 있었다. 예수께서 당신 뒤를 따라 오는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라삐,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지셨듯이 인간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다. 즉 찾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요, 사랑하는 애인이다.

 

즉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후 늘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이가 엄마를 찾듯이 늘 하느님을 찾았고 하느님을 찾아 나섰다. 그것이 인간이다. 왜 하느님을 찾는가? 하느님은 사랑자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애인을 찾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사랑을 먹지 못할 때 인간은 만족할 수 없고 기쁠 수가 없다.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할 때 인간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에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요한 복음은 처음부터 이렇게 사랑 자체이시고 우리 모두의 애인이신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인간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마리아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결국 요한 복음은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하느님을 찾아서 기쁜 마음으로 그 주님을 전해주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결국 마리아의 눈물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인간의 눈물이요, 슬픔의 눈물이다. 마리아의 눈물은 사랑하는 애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과 당황스러움에서 나오는 눈물이다.
 
그러면 어떻게 마리아는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찾을 수 있었는가?  마리아가 하느님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하느님을 찾기까지의 과정이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짧게 전해주고 있지만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잃어버린 인간이 하느님을 찾기까지 걸어가야 할 영적 여정이다.

 

우리도 우리의 눈에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려면 어쩌면 마리아가 걸었던 영적 여정의 걸음을 걸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울고 있는 마리아의 눈물을 멈추게 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며 헤메이던 마리아더러 오히려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뵌 일을 전하라고 파견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보라. 하느님을 잃어버렸을 때의 마리아의 모습과 잃어버린 하느님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를!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걸었던 그 영적 여정을 아주 간단하게 살펴보자.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러 간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고, 아직 어두운 시간이었다. 어두운 시간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 점 더 어두워지는 시간이 아니라 점점 더 밝아지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절망적이기보다는 희망이 보이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아직 어두운 시간임에는 틀림없다. 바로 여기에서 마리아의 영적 여정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어두운 시간에 여인이 혼자 무덤에 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무덤에 가보았자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두운 이른 새벽에 무덤을 향해 홀로 나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 갈 수 있었던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용기를 갖게 하였을까?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두려움을 극복케 한다. 사랑은 용기를 북돋아 준다. 사랑은 아무리 많은 장애와 어려움이 예상되어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발길을 재촉한다.

 

이런 용기 있는 영적 여정을 하고 있는 마리아는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많은 영적 동반자 즉 베드로와 요한, 천사들이 있었다. 아마도 마리아가 두려워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결코 사랑하는 애인인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마리아가 영적 여정을 하면서 받았던 많은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복음 묵상을 하는 이유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본명을 갖은 모든 자매님들에게  축하드리며 오늘 복음에서처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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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믿었다>(요한20,1-8)

 

시몬 베드로가 뒤 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 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오늘 복음에서 무덤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즉 무덤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덤은 우리들에게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곳으로서 혐오감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무덤을 가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무덤에서 두 부류의 반응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슬픈 마음으로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발라 드릴려고  이른 아침에 무덤에 갔는데 놀랍게도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할 시체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울면서 말하였다. 결국 그녀는 너무 슬퍼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또 한 부류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놀라서 무덤으로 달려가 들어가 "보고 믿었다." 그러니까 똑같은 무덤에서 한 여인은 슬퍼서 울고 있었고 두 제자는 "보고 믿었다." 마리아에게 무덤은 슬프고 무서운 장소이지만 두 제자에게 있어서 무덤은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자기들 눈으로 보고 믿음을 갖게 된 장소였다.

 

마리아처럼 무덤을 인간의 마지막 장소라 생각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과 두 제자들처럼 무덤이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즉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죽음 너머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부활한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과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 삶의 태도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좋은 일을 하고 어떤 복을 받기 위해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죽음을 극복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어야 한다. 죽음 너머의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세계를 지향하며 사는 생활이어야 한다.

 

이런 믿음에 이르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믿음은 제자들이 처음 예수님한테 불리움을 받은 그 순간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직접 예수님한테 보고 듣고 배우면서 성숙해진 믿음이다. 이 단계를 거쳐 마지막 단계의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처음부터 보지 않고 믿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보고 들으면서 성장되는 믿음이어야 하고 그런 단계를 거쳐서 나중에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단계로까지 성숙되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럼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복음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열 두 제자들을 교육시키셨던 교육의 내용을 보고 그 발자취를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한 발짝 한 발짝 우리의 믿음이 성숙되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서 펼쳐 보여 주시는 하느님의 나라, 영의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세계 즉 부활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간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믿고 부활의 삶을 미리 살아갈 것이다.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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