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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책감과 가책감 때문에 /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4-23 조회수686 추천수7 반대(0) 신고

4월 23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요한 20, 19-31)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님의 강론 말씀입니다.

 

오늘은 주님 자비주일로 2000년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자비주일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탕자를 받아 주시는 아버지와 같은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대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샬롬)."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말씀이 세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갈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굉장히 노력합니다. 얼마나 철저히 검색하는지 모릅니다. 로마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려고 할 때 3시간 동안 검색을 하였습니다. 테러분자가 있을까봐 그러는데 그만큼 그 사람들은 평화를 지키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에게도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쟁이 없다고 평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본 사람은 정작 우리를 불안하게하고 두렵게 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압니다. 말다툼이 우리를 얼마나 신경쓰게 합니까? 우리의 게으름, 약속을 어긴 것들이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

 

첫번째로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문이 다 잠겨 있는데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2000년전에 벽을 투사해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토마스가 없을 때와, 토마스가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늘 우리 가운데 계셔야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는 서로가 주도권을 쥐려는,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것에서 일어납니다. 남편이 중심이 되어도 부인이 중심이 되어도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본당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교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 중심이 되어야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두번 째, 용서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지 않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남아 있을 것이다." (22-23절)라는 말씀과 같이 용서 없이 우리는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용서가 없다면 죄책감과 가책감 때문에 결코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7번씩 70번이나 죄를 짓지만 그래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 때문입니다. 용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면 평화롭지 못합니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불편해 집니다. 아무렇지도 않던 길이 갑자기 불편해져 그 사람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가게 됩니다. 그 사람은 내가 아무리 미워해도 길을 가다가 다리가 부러지지 않습니다. 나만 잠을 못 자고, 밥맛 없어지고 그렇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걷어내야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믿음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1요한 4절)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어서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오늘 의심장이 토마스가 말해줍니다. 우리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토마스가 말합니다. 우리는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지 압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해야하고 모든 것을 다 움켜줘야 하고, 문도 걸어 잠그고 혼자서 다해야 합니다.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 토마스 사도는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8절)

 

이 말은 신앙고백입니다. 이제 토마스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계셨던 예수님이 토마스의 마음 한가운데에 계셨기 때문에 어떤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처음에 제자들이 말해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토마스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체험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모르겠어요. 여러분이 어떤 하느님을 체험하고 계신줄을...

 

옛날에 한 젊은 왕자가 임금님이 되었습니다. 젊은 왕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보다가 어느 고을에서 마음에 드는 예쁜 아가씨를 만났습니다. 그 왕이 "내가 어느 어느 날, 파티를 하겠으니 꼭 참석해 달라." 고 아가씨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초대되어서 왔습니다.

 

파티가 다 끝날 무렵,"당신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 는 왕의 말에 그 여인이 한 가지 소원을 청했습니다. 여인은 그 한가지 소원으로 전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왕을 청했기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며 하느님을 청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청하면 하느님을 얻는 것이고, 하느님의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과연 예수님은 여러분의 "하느님의 어린양" 이십니까? 신학을 통해서 배우는 예수님, 복음에 씌여진 하느님이 아니라 정말 여러분의 하느님이십니까?

 

정말 여러분에게 하느님은 누구신지, 다른 사람이 가르쳐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이 누리는 평화는 아무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 부르고 내안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수 있도록 미사중에 도움을 청합시다.

 

* 제가 로마에서 있을 회의 때문에 1주일간 없게 됩니다. "세례받지 않고 죽은 어린이들의 존재" 라는 주제로 교황청에서 논의가 있게 됩니다. 너무 많은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벌써 10년전에 1년에 150만명이 낙태로 죽어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이런 아기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는 어떤 입장을 보여야 하나? 여러분들이 기도중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가르침이 잘 정리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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