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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61)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에 관한 나의 견해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5-06 조회수766 추천수14 반대(0) 신고

2006년5월6일 부활 제3주간 토요일 ㅡ 사도행전9,31-42 ;요한6,60-69ㅡ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에 관한 나의 견해

                                                               이순의

 

 

굿뉴스 자유 게시판에서 만난 사람들(약칭- 굿자만사)이 유무상통마을을 다녀왔다. 굿자만사의 오프라인에서 만난 자메님께서 시설의 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어서 그 곳에 들려 마음을 드려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병행이 되었다. 그러나 주 목적은 무료시설인 베드로의 집이라고 했지만 가톨릭 전례의 핵심인 미사가 집전되고, 성직자의 훈화가 함께하신 유무상통 마을에 촛점이 맞춰진 것은 사실이다. 모두들 즐거웠고, 새로운 것인 줄 알았지만 새로운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을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유무상통 마을을 다녀 온 여러 굿자만사 오프라인 벗님들의 신명은 간단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연한 이치라고 본다.

 

왜 유무상통 마을에 대하여 말이 많은지? 왜 방신부님에 대하여 이단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면서 참여하신 분들도 상당했던 것 같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교회이기도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교회는 서양종교이기도 하다. 아니 우리민족의 원시종교인 단군신앙을 제외한 모든 종교가 이국에서 수입한 종교라고 해야 적법한 표현일 것이다. 종교의 정통성이라든지, 당위성에 대하여 굳이 말을 하자면 어느 종교도 할말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종교가 종교 안에서 의견들이 분분하고 말들이 많아야 하는 지에 대하여는....... 일반적인 평신도나, 이교인들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굿자만사 가족들이 봄 한 철 원족 삼아서 다녀 온 탐방으로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가서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원래 더 말이 많다고 불평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가서 좋은 공기 마시며, 좋은 말씀 안에서 머물다 오신 그 자체에 대하여 누구도 언쟁이나 토를 달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의 성품 안에서 서품을 하신 사제의 미사에 분명히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그 결과로 성체께서 친히 모든 벗님들 안에 들어와 살이 되고 피가 되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연히 받은 성령의 은총이 성대 하였고, 몰이해가 이해로 전환 되었으며, 충만하신 기쁨 가운데 <아~! 그렇구나.> 라고 느끼고 오시면...... 평신도의 탐방으로는 충분한 완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굿뉴스 안에서 힘이 실리는 수의 탐방이다 보니....... 그 이견들에 대한 적확한 발설을 하기가 조심스러워 진 것이다. 굿자만사 벗님들이 보고 느끼고 감동받아 오셔서 충분히 알려주시는 것은 좋은 일이며 타당하지만, 유무상통 마을과 방신부님에 대하여 이견을 가진 견해 또한 바르게 전달되어져야만 한다. 마치 아무런 문제도 아닌데 공연히 멀쩡한 방신부님만 이단 취급한다 라고 역행적 홍보가 자행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 토착화 되어야 할 전례연구가 무수히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진행 될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이 어떻게 하면 한민족에게 가장 상징적 표징이 될 것인지에 대하여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우선하는 원칙은 가톨릭이 지구 안에서 역사 이례로 지탱하여 온 정통성의 손실은 최소화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과 다수의 민속학자들과 성직자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평신도에 이르기 까지 가톨릭의 정통성과 토착화 사이에서 알든 모르든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 것이다. 어느 종교든지 내 생활이 내 종교이면 그 보다 더 좋은 종교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옷을 입어도 내 몸에 맞는 옷처럼 편한 옷이 없다. 값이 비싸든지 누더기든지 간에 상황에 따라서 웨딩드레스라든지 작업복이라든지 활동복이라든지 의복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편하기 위한 편리추구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의복이 아닌 정신적 지주를 삼아 행, 불행과 직결되는 영적 추구이므로 수시로 선택하여 착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토착화를 마련한 것이고, 그 토착화의 기본정신에는 절대자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의 어디에서나 고르게 존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라는 데서 합당한 명제를 제시한다. 

 

나는 방신부님을 결코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분이 이단적 행위를 했다면 나 보다 더 먼저 교회가 방신부님을 퇴출 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내부에는 다른 이견이 존재하며 그 다름을 존중하고 배려해야만 시대적 수용과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방신부님의 토착화는 대단한 무리수를 가지고 등장한 전례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이단으로 쫒김받지 않은 이유는 주님의 부활을 믿어 선포하며, 주님의 말씀이시며 그 자체이신 성경에 반대하지 않으며, 주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미사성제의 정통성 훼손은 절대적으로 삼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것들! 예를 들어서 성상이라든지, 성전 꾸미기라든지, 등을 통하여 토착화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지켜 따르고 보존 유지하는 정통 가톨릭의 미사성제와 그 외의 무수한 계명들을 그대로 준수 시행하는 사제직을 실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에 방신부님께서 세계가 하나의 형식으로 봉헌하는 주님의 만찬의식인 미사성제를 토착화 한다는 명목으로 무당 푸닥거리나, 목탁을 두둘긴다든지, 의식의 변형을 접목하여 영성적 과오를 초래 하였다면........ 교회는 즉각적인 이단으로 분류하여 퇴출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르다고 하는 것인가?

굿자만사님들의 소감은 유무상통 마을과 방신부님에 대하여 상당히 고무적이고 합일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가서 보았더니 좋던데...... 라는 의견에 치중하여....... 자칫 그르다고 보는 사람들의 의견을 오류로 간주하게 되는 또 다른 오류를 낳는 여운을 마련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방신부님께서 왜 가톨릭의 이단이 아닌지를 분명히 밝혀 드렸듯이, 지금부터는 방신부님의 어떤점을 그르다고 보는지에 대하여 내 나름의 견해를 설파해 보고자 한다.

 

얼마 전에 일요일 청년 미사에 참례 하였는데 옆에 앉은 자매님이 몇 가지 물어오셨다. 우리 본당에서는 청년미사 성가집이 다르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좀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낯설지는 않으므로 그대로 집중할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의 신자가 아니라는 분께서 옆에 앉으셨으므로 공연히 처음 오신 분은 아닌가 하여 미사 내내 살피게 된 것이다. 기도서도 펼쳐 드리고...... 그런데 이분이 복음선포 의식을 모르는 것이다. <†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 주님 영광 받으소서.> 분명히 세례를 했다면 주님의 말씀을 머리로 생각하겠다는 표시로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입술로 전하겠다는 표시로 입에 십자 표시를 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서 몸으로 실천하며 살겠다는 표시로 입술에 십자 표시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분은 그 상징적 표시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책에 표시를 해 두었다.

 

미사 내내 나는 이분이 예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더욱 각별한 배려를 하며 미사에 함께 참례하였다. 그런데 성체를 모실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신자인지를 확인하였고 그분은 성체를 모시러 나갔다. 미사가 끝나고 나는 그분께 말씀을 듣는 의식에 대하여 간단한 교리(?)를 해 드렸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여서 알려드렸다. <이 의식이 당신을 구원으로 이끌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가톨릭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해 드리는 표징입니다.> 라고 알려드렸다. 아마도 그분은 다시는 복음선포 의식을 잊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이렇듯이 가톨릭의 의식이나 전례가 주님을 믿는 것 만큼 영혼을 구제하는데 막강한 힘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톨릭이라는 신앙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고, 그 표징들을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다.

 

외람되지만 지금부터는 구체적 의견을 발설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방신부님이나 유무상통 마을에 결례를 범할 마음도 없고, 토착화를 반대할 마음은 더욱 없으며, 가톨릭 교회의 분쟁을 초래하고 싶은 의도나 굿자만사님들의 좋은 탐방에 찬물을 끼얹을 심산은 없다고 밝혀 드린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지만 방신부님의 토착화 방안이 오류가 아니듯이, 그것을 가지고 의견을 제시하시는 분들 또한 오류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을 뿐이다. 한 방향으로 치우친..... 그것도 방신부님을 직접 만나서 작품들에 관한 영성을 직접들으신 이해만큼이나 반대 의견들을 제시하시는 분들도 그에 버금가는 영성적 안목은 있더라는 말이다. 그것들을 옳으니 오류니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요. 그저 느끼시는 대로 바라 봐 주시고, 모두 다 인정해 주시고, 함께 더불어 발전하는 가톨릭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먼저 얼마 전에 교황청에 봉헌되어진 성모자상에 대하여.   

    

                                                                   사진 - 박혜서님 꼬리에서

 

 

 

등에 아기를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이고 젖가슴을 드러낸 성모님에 대하여 찬성의 여론은 <나 어렸을적에 동생을 업으신 내 어머니> 그대로 라는 현실적 체험구조가 주류를 이룬다고 본다. 그러나 반대의견에서 좀 더 깊은 이해를 구하자면 저 어머니 상은 전통 우리의 여인상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신한 규수! 티 없이 순결한 처자!를 원했던 우리네 전통은 양반이든지 천민이든지 여인의 표상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즉 가난한 떡장수이신 한석봉의 모친이라든지, 지덕의 표본이신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꼽지 않더라도 뭇 서민의 아낙들도 저렇게 가슴을 통째로 드러 내놓고 사는 민족은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성 마리아의 성서적  관점을 배제 하더라도 조선여인의 보편적 여인상을 달리해야 한다는 민속학적 견해가 팽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강길님 게시물에서

 

 

 

이런 성모자상도 있다.

이런 작품들을 놓고 방신부님의 영감은 엄마의 품에 안겨서 성장해 본 뭇 사람들의 향수라는 점에서 여과없이 전달되고있다. 그러나 반대여론은 좀 더 보편적인 한국여인상을 대표했어야 한다는 견해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교황청에 봉헌한 성모자상은 옳다. 그러나 아래의 성모자상은 옳지 않다. 라고!

그 이유는 등에 업은 젖먹이를  둔 우리네 여인들은 저렇듯이 젖무덤을 내어놓고 다니기도 했다. 농경사회가 주류를 이루었던 우리의 문화가 여인들에게 늘 바쁜 노동력을 요구해 왔으므로 당연히 육아와 생활을 동시에 감당해야만 하는 어머니들은 큰 아이뿐만 아니라 작은 아이까지 치마폭에 끼고 젖을 물리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들은 제 몸 가누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방신부님께서 성장하신 전쟁 후의 이 나라는 근대화 이전의 국가적 빈곤으로 인하여 전통의 여인을 상징하는 시대라고 볼 수가 없다. 생존에 온 몸을 던져버린 희생양으로서 모진 삶을 지탱해야만 했던 어머니 시대를 겪고 목격하였을..... 그런 시대적 정서가 등에 업은 아기 예수와 젖무덤을 들춰 낸 성모님을 통해 서정적 공감대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래의 조각상을 오류라고 보는 이유는 성모님은 자식을 하나 만 두었다는 사실이다. 등에 작은 지게를 진 소년 예수님을 둔 성모님께서 젖을 물리지도 않을 것인데 저렇게 젖무덤을 들추고 다녔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굳이 성모님이 아니라도 젖먹이도 없는 보통의 조선 여인들이 맨날 젖무덤을 내어 놓고 물동이를 이거나 거리를 활보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서 아래의 성모자상은 오류라고 보는 것이다. 어쩌면 아래의 성모자상은 성서적 견해의 성모님을 토착화해서 고안한 성모님이라기 보다는, 방신부님께서 동생을 둔 어머니를 바라보신 유년의 추억이거나 이웃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셨으리라는 짐작이 더 크다. 이런 그리움 속의 모자상이 성상으로 전환되었을 것이고, 토착화 되는 과정에서 습작되어 진 작품이 아래의 성상이라고 짐작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적격의 성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돌 조각품의 의미가 우리의 구원사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지에 대하여는 전혀 무관하다. 로마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보는 영감에 따라 느끼고 담아 갈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이신 방신부님께서 그 자리에 서서 우리민족의 여인상을 이론적으로 일일히 설명하고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우리가 성지에 들려 보고 온 인상 깊은 성상을 기억하는 수준 정도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학자들이나 민속적인 측면의 보편적인 견해에서 볼때 한국사회의 여인상이 거룩한 동정녀의 성경적 측면과 근접하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요청일 것이다. 혹자는 목수의 아내이며 가난한 마리아께서 한국에서 살았다면 젖무덤보다 더한 것도 내어놓았을 것이다 라고 피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가난한 목수의 아내라고 해도 소년으로 자란 아들의 손을 잡은 어머니가 젖무덤을 내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아기예수를 등에 업고 젖무덤을 내어 놓으신 성 마리아상이 교황청에 봉헌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서는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며, 보는 이국의 순례객들도 젖먹이를 둔 마리아의 모성적 관점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본다.

 

또 한 가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님!

 

  

사진 - 이강길님 게시물에서

 

 

물론 나는 유무상통 마을을 방문하지 않았고, 방신부님께서 추구하시는 영성적인 강론과 훈화는 듣지 않았다. 직접 뵙고 들어보았다면 그분의 영감에서 오는 작품세계에 대하여 이해의 폭을 헐씬 넓히고도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교회의 토착화를 일구신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입장은 인정하셔야 한다는 점이다. 가톨릭 교회에 몸 담은 성직자나 종교학자나 민속학자가 아니더라도 아무런 식견이 없는 무지랭이 평신도가 보아도 저 예수님 상이 순수 예수님 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언뜻 보아도 미륵보살반가상을 연상하게 된다. <이 성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평화로우신 모습입니다.> 라고 아무리 주장을 하여도 수 천 년동안 인식되어져 온 일반적인 견해를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 친히 평화롭기 위하여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분이 아니다. 부활이라는 구원사업이 반드시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 교회의 원칙론적 신앙이다. 이 점이 우려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사진- 박광용님 게시글에서

 

 

나의 견해로는....... 불교계에서 종교의 일치를 명목으로 하여 어느 스님께서 부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달아놓고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깨달았습니다.> 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견해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부처님입니다.> 라고 인정하는데는 결코 쉽지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주님께서 전도여행을 하실 때는 저런 자세를 취하여 앉아 말씀하신 적이 한두 번이었을 것인가?! 이렇게도 앉으시고 저렇게도 앉으시고, 사람이 취하는 모든 자세를 다 취하여 앉으셨을 것이므로........ 저런 자세를 꼭 부처님만 앉았으란 법이 있느냐?고 반격해 온다면 해야 할 말도 변명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견해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모작일 수 밖에 없다. 우리 교회의 예술인들이 성상을 조각하고 가장 힘들어 하는 점이있다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놓은 성모자상을 출품하면 바로 몇 일만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모작을 만들어 놓고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는 점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도 토착화의 당위성은 민족적 견지 안에서 지극히 가톨릭적 발상을 제공해야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심지어는...... 그러니까 보는 시각에 따라서 젖무덤을 들추고 소년 아들 예수의 손을 잡은 성 마리아를 性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정숙한 어느 조선여인이 다 큰 아들의 손을 잡고 젖무덤을 발기고 다녔더냐?>는 반론이 제기 된 것이다. 이 또한 지극히 일반적인 견해에서 발생한 이견일 것이다. 지금 서양에서는 동양사상에 심취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구원이라는 내세주의를 살아 본 사람들의 현실적 공허감은 동양사상의 참선으로 현세적 마음을 다스리기에 이르렀다. 반대로 동양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활성화 되어 역선교라는 중 차대한 사명을 실현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심성은 현실적 선의 마음을 살아보았어도 인간의 뜻으로 이르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하늘의 구원을 믿어서 인간이 극복하지 못하는 영혼의 세계를 기약하는! 이렇듯이 신앙의 정체가 돌고 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다 같이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체험적으로 인정해 온 것들은 쉽게 세뇌 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톨릭은 가톨릭이라는 몸에 맞는 옷을 디자인 하여 토착화를 일구어 가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너무나 길고 비중있는 소재로 묵상을 삼다보니....... 그 중압감에 짓눌려 심신이 피로하다. 내가 청년미사에서 복음 선포 의식에 동참하지 못하는 교우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싶다.

<이 의식이 당신을 구원으로 이끌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가톨릭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해 드리는 표징입니다.>

젖 무덤을 들춘 성모님이든지, 미륵보살 반가상을 닮은 예수님이든지, 그 성상들이 우리들의 구원을 이끌지는 않는다. 그저 하나의 돌덩이에 사람의 영감을 담아서 보는 이들의 신심을 도와 줄 뿐이다. 이미 교황청에 봉헌 된 성상은 오류든지 아니든지 되돌아 올 수가 없다. 미래 세계의 가톨릭 교회에 오래오래 전해 질 것이고, 그 평가는 후대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를 등에 업고, 젖무덤을 들춘 성모님을 내리라든지, 바꾸라든지, 하는 그 언어 자체가 무의미한 메아리인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의 구원은 내 자신의 믿음 안에서 완성되어 진다는 확신이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창작을 한다는 것은 창작을 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다. 듣고 보고 알았다고 해서 긍정적인 견해만을 피력한다면........ 부정적인 견해들은 자칫하면 모두 오류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런 묵상글을 써 보았다. 모두 우리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한국적으로 정착해 가기 위한 서로의 노력이며 애정이라고 인정하고 싶다. 개인적인 나의 생각을 펼쳐 보았다고 해서....... 마치 내가 방신부님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곡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분은 사제이시고 나는 신자이다. 그분이 집전하는 모든 성사집행에 대하여 성교회와 성교회의 수장들이 검증하고 인정하여 허락하신 동안 나는 절대적으로 순명할 것이다. 또한 그분의 예술적 영감과 동양적 사상을 그리스도화 하시려는 노력에 대하여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방신부님께서 가톨릭의 사제이신 만큼 가톨릭의 방법, 즉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방식 안에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토착화를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후대 교회는 그런 기초를 바탕으로 연구와 발전을 또 거듭해 갈 것이고!

 

† 한국의 성인성녀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의 성모님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세상만민들의 창조자이신 하느님아버지시여.

◎ 찬미를 받으소서.

† 모든이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여.

◎ 영광을 받으소서.

† 굿뉴스와 함께 동행하시는 성령이여.

◎ 유무상통 마을과 방신부님께 은총을 주소서

-아멘!-

 

ㅡ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요한6,61-63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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