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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로 사랑하여라'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5-17 조회수651 추천수1 반대(0) 신고

<서로 사랑하여라>(15, 9-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시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십까?

하느님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라고 새로운 하루를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이 해야할 것을 명령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고 시간을 주셨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은 서로 사랑하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대화를 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활동을 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나요?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만이 서로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애(愛)자는 뜻이 깊은 글자다. 받을 수(受)자 사이에 마음 심 (心)자가 들어 간다. 사랑이란 무엇이냐? 참 마음을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인생은 서로 주고받는 존재다. 따뜻한 말을 주고받고, 정다운 웃음을 주고받고,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고, 깊은 애정을 주고받는다. 행복은 서로 따뜻한 말과 웃음과 애정을 주고 받는데 있다. 정다운 말과 웃음과 애정을  서로 주고받지 못할 때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다. 사랑은 애정의 쌍방통행이다.

 

짝사랑은 애정의 일방통행이다.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사랑, 오기만 하고 가지 않는 사랑 그것이 짝사랑이다. 짝사랑은 행복한 것이 아니다. 애정은 모름지기 쌍방통행을 해야 한다. 오는 만큼 가고 가는 만큼 와야 한다. 그것이 바람직한 애정관계이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우리의 생명에 기쁨을 주고 향기를 주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인간에서 사랑을 제거하면 인생은 빛을 잃고 허무감과 무력감에 빠진다. 즉 사랑은 우리가 서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음식이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불행해진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먹고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시고 마셔도 목마르다. 인간의 불행은 사랑을 하지 않은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나폴리 속담에 인간은 "왜 사느냐?"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도 살 수 있지만 "누구를 사랑하느냐?라는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마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절대적이다. 사랑을 하고 싶은데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한 인간을 보라.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들의 울부짖음, 애인을 찾지 못한 젊은 이들의 방황,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레 사랑하는 자식을, 부모를, 남편을 아내를, 친구를 잃어버린 인간의 울부짖음을 보라.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또 찾지 못했을 때 인간은 방황하게 되고 고통을 겪게 되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다.

 

그들의 생에는 의욕이 없고, 그들의 얼굴에는 빛이 없고, 그들의 행동에는 기쁨이 없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 존재의 기둥이요, 마음의 대들보다. 사랑은 곧 인생의 희망이요, 기쁨이요, 빛이요, 힘이다. 

 

죄란 무엇인가? 사랑해야할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해야할 대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은 누구이신가?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은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사랑자체이시고 그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마르 12,29-31)는 첫 째 계명을 주셨다.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은 불행해진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럼 사랑하라고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색의 천재였던 희랍인들은 인간의 여러 가지 사랑을 세 개의 단어로 요약했다. 희랍인은 사랑이란 말을 그 대상에 따라서 세 가지로 표시했다.

 

첫째는 아가페요, 둘째는 필리아요, 셋째는 에로스다. 아가페는 신에 대한 종교적인 사랑이요, 필리아는 우정을 바탕으로한 인간 일반에 대한 사랑이요, 에로스는 남녀간의 이성적인 사랑이다. 아가페와 에로스와 필리아의 구분은 사랑의 대상에 따라서 사랑의 성격과 내용과 표현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고 했을 때 사용한 희랍어 단어는 "아가페"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그럼 아가페적인 사랑이란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가?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다. 즉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다.

 

바오로는 사랑의 송가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말하였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1코린 13장 참조)


이것 이외에 사랑은 다음 세 가지 속성을 지닌다.
첫째는 따뜻한 관심이요, 둘째는 강한 책임감이요, 셋째는 정성스런 헌신의 태도이다.


첫째 사랑은 따뜻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깊고 따뜻한 관심을 갖는다. 사랑이 많고 강할수록 관심이 크고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관심이 적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사랑은 무관심하지 않은 것이다.

 

무관심할래야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꽃을 사랑하면 꽃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는다. 예술을 사랑하면 예술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는다. 사랑과 관심은 정비례한다. 사랑의 정도가 관심의 정도를 결정한다.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그 대상에 대하여 이해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은가? 하느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가?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라. 그러면 사랑의 싻이 싹트기 시작할 것이다.

 

둘째로 사랑은 강한 책임감으로 나타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하여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건강과 교육과 미래에 대하여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깊은 책임의식을 느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 무책임할래야 무책임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정도와 책임감의 정도는 서로 정비례한다.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이 잘 되고 잘못 되는 것이 다 나에게 달렸다고 느끼고 그것이 잘 되기 위하여 내가 마음을 쓰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끝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정성스런 헌신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성을 쏟고 땀을 흘리고 헌신적인 희생을 바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피와 땀과 노력을 바친다. 우리는 사랑할 때에 정성스러운 헌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본체 만체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랑해야할 대상에 대해 헌신적인 봉사를 해보자. 그러면 나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랑은 자기중심의 이기주의가 아니다. 상대방의 완성과 행복을 위하여 나의 정성을 바치고 나의 노력을 다하고 나의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을 크게 만들고 깊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요, 위대한 빛이다.

 

위대한 인물이면 위대한 인물일수록 크고 깊은 사랑의 세계를 갖는다. 평범한 시민은 자기의 가족과 친구밖에 사랑하지 않는다. 그의 사랑과 대상은 적고 사랑의 세계는 좁다. 그러나 위대한 인물은 자연과 진리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 예술에 대한 사랑을 느낀다. 그의 사랑의 세계는 넓고 크다. 무엇을 얼마큼 사랑하느냐를 보고 그 사람이 훌륭한가 훌륭하지 아니한가를 판단할 수 있다. 사랑의 크기와 인간의 크기는 서로 비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사랑의 기준은 이기적인 나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아가페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한 사랑,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랑을 우리도 실천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랑은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란 이기적인 사랑일 뿐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이기적인 사랑에서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계명을 지켜야 한다. 왜 우리는 계명을 지켜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지를 모른다.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계명이다. 계명 속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이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 우리의 방법으로가 아닌 하느님의 방법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될 때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방종이다. 사랑은 하나의 질서요, 길이다. 많은 이가 이혼을 밥먹듯이 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희생이요, 헌신이요, 책임감이다. 내가 좋으면 함께 살고 싫으면 헤어지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이지 아가페적인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랑에서 아가폐적인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계명을 지키는 가운데 아가페적인 사랑을 배우게 되리라. 오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가운데 사랑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란다.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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