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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5-29 조회수648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년 5월 29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John 16,33) 

 

 

 

제1독서 사도행전 19,1-8

 

복음 요한 16,29-33

 

어제는 주일을 맞이해서 성지에 많은 순례객들이 오셨습니다. 사실 그 많은 순례객들을 어떻게 맞이하나 걱정을 많이 했었지요. 왜냐하면 전날 일기예보를 보니 어제 오전이 비 올 확률 90%였거든요.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아주 맑은 날씨를 주셔서 정말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순례객들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많은 순례객들로 인해서 북적대는 성지의 모습 안에 저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순례객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때 마침 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보니 상대방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더군요. 저는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한쪽 귀를 막고 큰 소리로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통화를 마쳤을 때, 어떤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한쪽 귀를 막고 통화를 하는 것보다, 신부님 휴대전화의 말하는 아랫부분을 손으로 막고 듣는 것이 훨씬 잘 들려요.”

제가 이제까지 못 듣던 이야기였습니다. 아마 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소음이 심한 곳에서 통화를 할 때에는 자신의 귀를 막고서 통화해야 한다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휴대전화가 울렸고, 저는 그분의 말씀이 기억나서 실제로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정말로 놀랐습니다. 진짜로 나의 한쪽 귀를 막고 듣는 것보다, 휴대전화의 말하는 부분을 막고 듣는 것이 더 잘 들렸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이 모습은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못합니다. 물론 나는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고 말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왜 그럴까요? 나의 귀를 막아버리고, 대신 나의 입만 열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의견이 항상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음이 심할 때 잘 듣기 위해서는 내가 말하는 부분을 막아야 하는 것처럼, 이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보다 더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나의 의견이 나오는 입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야기해주십니다. 즉, 주님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어떤 고난과 시련에서 용기를 얻어 주님처럼 세상 안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우리들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더욱 더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지만 평화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입을 막아야 합니다. 욕심과 이기적인 내 마음이 드러나는 내 입을…….

 

                       말조심 합시다.



 
당근, 달걀, 그리고 커피(우애령, '상담 에세이 희망의 선택' 중에서...)


 

 

한 젊은 딸이 어머니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는게 너무 힘들어서 이제 그만 두손 들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냄비 세개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는 첫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넣고 세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었다. 어머니는 냄비 세개를 불 위에 얹고 끓을때까지 아무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후 불을 끄고 딸에게 당근을 만져보라고 했다. 당근은 만져보니 부드럽고 물렁했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달걀 껍데기를 벗겨보라고 했다. 껍데기를 벗기자 달걀은 익어서 단단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딸에게 커피 향내를 맡고 그 맛을 보라고 시켰다. 딸은 커피향을 맡고 한모금 마셨다.

어머니는 설명했다. "이 세가지 사물이 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단다. 끓는 물이 바로 그 역경이지. 그렇지만 세 물질은 전부 다 다르게 반응했단다. 당근은 단단하고 강하고 단호했지. 그런데 끓는 물과 만난 다음에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달걀은 연약했단다. 껍데기는 너무 얇아서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끓는 물을 견디어내면서 그 안이 단단해졌지. 그런데 커피는 독특했어. 커피는 끓는 물에 들어간 다음에 물을 변화시켜 버린거야."

그리고 어머니는 딸에게 물었다. "힘든일이나 역경이 네 문을 두드릴때 너는 어떻게 반응하니? 당근이니, 달걀이니, 커피니?"

나는 강해보이는 당근인데 고통과 역경을 거치면서 시들고 약해져서 내 힘을 잃었는가. 나는 유순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열이 가해지자 변하게 된 달걀일까. 전에는 유동적인 정신을 지니고 있었지만 죽음과 파경과 재정적인 고통이나 다른 시련을 겪은 후에 단단해지고 무디어졌을까. 껍데기는 똑같아 보이지만 그 내면에서는 내가 뻣뻣한 정신과 굳어버린 심장을 지닌채 쓰디쓰고 거칠어진것은 아닐까.

아니면 나는 커피와 같을까. 커피는 실제로 고통을 불러온 바로 그 환경인 뜨거운 물을 변화시켰다. 물이 뜨거워졌을때 커피는 독특한 향기와 풍미를 낸 것이다. 만약 내가 커피와 같다면 그럴때 나 자신이 더 나아지고 주위 환경까지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어둠속에서 시련이 극도에 달했을 때 나는 다른 레벨로 상승할 수 있을까??


홀로선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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