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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 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01 조회수82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 6월 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I in them and you in me.

           May they be brought to complete unity

          to let the world know that you sent me

      and have loved them even as you have loved me.

                                        (John 17,23)

 

 

제1독서 사도행전 22,30; 23,6-11

 

복음 요한 17,20-26

 

아주 유명한 현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명성이 커짐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고자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현자는 사람들을 마당에 불러 모았습니다.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하나의 선을 그었지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이 흙바닥 위에 하나의 선을 그었는데, 이 선을 두 배의 길이로 만들어 보십시오. 단, 이 선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바닥에 선이 하나 있는데, 이 선을 건들지 않고 두 배의 길이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은 선에 생명이 있어서 저절로 커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만 갸우뚱대면서 엉뚱한 문제를 낸 현자를 원망의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더니만 현자가 그은 선 바로 옆에 그 선의 절반 크기로 선을 긋는 것이 아니겠어요? 바로 그 순간 현자는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현자가 그어놓은 선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현자가 그은 선보다 절반 정도로 짧은 선을 그었으니 당연히 현자가 그은 선이 두 배로 길어진 것이 되겠지요. 맞아요. 현자가 그어 노은 선을 건드리지 않고 그 선을 두 배로 길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짧은 선을 바로 옆에 긋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특별히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주님을 들어 높이는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선을 짧게 긋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선을 주님의 선보다 더 길게 그리려는 욕심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모두 하느님 아버지 밑에서 하나 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하나이시듯이, 우리들도 하나가 되어 살 수 있기를 기도해주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 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셨지요. 바로 자기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낮아지심, 그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치욕과 모독을 당하는 낮아지심,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낮아지심. 그 낮아지심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하나 됨은 물론, 우리들과도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해주셨습니다. 마치 앞선 이야기의 그어진 선을 건드리지 않고 두 배의 길이로 만드는 방법처럼,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아지고 작아짐으로써 하느님 아버지를 들어 높이셨던 것입니다.

어떤 구경을 갔을 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키가 크면 우리들은 까치발을 세우곤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잘 보이지 않는 장면을 보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모습이 완전할까요? 아니지요. 힘이 빠지면 다시 보이지 않게 되어 원래대로 돌아오고, 그래서 다시 힘을 내어 까치발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불완전한 높아짐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저부터가 이렇게 불완전한 높아짐을 지향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불완전한 높아짐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어려워하면서도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까치발을 계속 딛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내가 작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저 나의 선을 주님보다 더 짧게 그으면 편한데……. 그리고 이런 낮아짐이 주님과 하나 되는 방법인데……. 그러한 낮아짐이 왜 이렇게 힘들까요?

                   

                         싸우지 맙시다.



 
험담을 하지 맙시다('좋은 글' 중에서)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는 말했습니다. “욕설은 한꺼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욕을 먹는 사람, 욕을 전하는 사람, 그러나 가장 심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욕설을 한 그 사람 자신이다.”

욕설이라고 하면 무지막지한 욕설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욕이라고 생각지도 않은 험담이 욕설이 되기도 합니다.때로는 험담이라고 생각지도 않은 진실(?)이 험담이나 욕설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배우자 사이에도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내 아내는 게을러서 탈이야.” “내 아내의 사치벽은 아무도 못 말려.” “우리 남편은 성격은 좋은데 무능한 편이야.” “술버릇이 나빠서 진절머리가 나.” 무심코 한 말이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과장해서 판단할지도 모릅니다. ‘누워서 침뱉기’란 말도 있습니다만, 배우자에 대한 험담은 자기에 대한 험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배우자와 함께 산다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우월감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다면 자기를 열등하게 보이게 하는 역작용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부부나 애인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군자는 절교를 한 뒤에도 그 사람을 욕하지 않는다.(君子交絶不出惡聲)”는 말도 있습니다만, 자기가 몸담고 있는 회사를 천연덕스럽게 욕하는 사람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험담하기 좋아하는 ‘똑똑하고 빈틈없는’ 분들에게 막심 고리키의 말을 소개해 드린 것입니다.


Awak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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