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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9) 토담집은 사라지고 / 박보영 수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01 조회수528 추천수5 반대(0) 신고

 

 

                        <토담집은 사라지고>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박보영 수녀님

 

   

 

집을 짓고 싶었다.

철골구조물에 시멘트를 입힌 차가운 건물이 아니라, 나무 이엉에 흙을 이겨 바른 토담집에 가마솥 걸고 솔갈비를 때는 그런 집 말이다.

 

반듯한 네모 깎은 나무가 아니라 있는 나무 그대로, 산을 줄인 듯 숲을 옮긴 듯 산벼랑을 안고 있어도, 또 있는 그대로 한쪽 벽 삼아 의지하는 그런 집 말이다.

 

이 집짓고 싶은 열망은 조그만 찻집의 주인이 되어 창을 어느 방향으로 내고 어떤 소품으로 벽면을 꾸미며 한쪽 서가에는 어떤 책과 어떤 음반을 진열할 것인가 하는 공상으로 지루한 수업시간을 눈속임하던 기억으로 떠오른다.

 

사람을 만나 도란도란 정을 기르고, 마음 밭에 물주고, 따가운 볕과 찬바람을 가려주며, 오늘은 지붕을 얹었네, 내일은 예쁜 창을 달아야지 하는 식으로 사람과의 관계 역시 이 집짓기 이미지와 상통하고 있으니 전생이란 게 있다면 나는 아마도 일당 몇 푼에 연연하지 않는 즐거운 허드렛군이 아니었을까 한다.

 

수도자의 길에 들어서서, 나의 집짓기는 어찌 되었는가.

어릴 적 질박한 토담집은 어느새 사라지고, 남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 아니라 나만의 폐쇄된 동굴이 주는 위로를 찾았다.

그런 동굴 같은 집채를 어깨에 지고 수도원의 회랑을 오가는 수련자를 상상해보자.

 

십자가는커녕 지푸라기 한 올도 더 얹을 수 없는 자신의 무게를 떠메고 끝없이 수련의 벼랑을 기어오르는 그는 신화속 시지프스나 영화 '미션'의 노예상 로드리고를 닮았을 것이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성전을 세우는데 내 평생 꼬박 걸렸다. 당신이 어찌 이를 사흘 안에 세운단 말인가? 놀랍게도 우리가 들이대는 대답도 유대인들과 한치 다를 바 없는 것이기 쉽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땀 흘리며 필사적으로 내 집을 짓는 동안 하느님 또한 필사적으로 그 집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은, 내가 있는 힘을 다해 집을 지으면 그것을 일순 무너뜨리시고 그 위 하늘의 별을 보게 하는 분' 이시라고 후배 수녀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애써 지은 집, 울며 매달리고 기도하고 인내하며 용서하고 다시 일어서고......

그렇게 차곡차곡 지은 집이 한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빈 하늘에 처량히 뜬 별 하나를 볼 때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내 힘이 다 빠지고 무릎을 꿇는 바로 그 순간에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탄식처럼 새어나오고,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진공 속에서 장엄하게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그 폐허들을 내가 복구하리라" (이사 44,26)

"옛 폐허들을 복구하고 오랫동안 황폐한 곳들을 다시 일으키리라." (이사 61,4)

 

어쩌면 이 사순은 공들여 기도의 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우상이 숨어든 내 아성을 처연한 마음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톨릭 다이제스트: 3월 셋째주 사순 제3주일에 즈음하여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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