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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좋은 것은 삼 세 번인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작성자조경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02 조회수727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 6월 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요한 21,17)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Peter was distressed that he had said to him a third time,
"Do you love me?" and he said to him,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to him, "Feed my sheep.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이나 거듭 물으신 뒤 양 떼를 돌보아 주도록 당부하십니다

 

☆☆☆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도 똑같이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입술로만 사랑할 때가 많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행동이 없는 사랑 역시 죽은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모든 좋은 것은 삼 세 번인가? †

우리는 지난 3일 동안 요한복음 17장이 보도하는 "대사제의 기도"를 미사복음으로 묵상하면서 예수께서 믿는 이들의 일치(一致)를 얼마나 원하시고 또 강조하고 계신가를 보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고별의 밤을 생애(生涯)의 어느 밤보다 길게 보내시면서, 그 밤의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를 바치신 것이다. 제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가운데 곧 들이닥칠 수난과 죽음의 재난을 내다보시며 바치시는 기도이기에 이 기도는 더욱 더 간절함과 애절함을 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가 모든 일치의 원리며 원칙이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일치에는 조건이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는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바램이다. 따라서 교회의 분열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에 어떤 흠이 된다거나 "옥(玉)에 티"가 아니라 바로 위반이며 범죄이다.

긴 고별담화(요한 13-16장)와 고별기도(요한 17장)를 끝으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그대로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자신을 길을 가셨다. 예수께서 대사제와 원로들의 손에 넘어가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수제자 베드로는 예언대로 세 번이나 스승을 배반하였다.(마태 26,69-70; 요한 18,15-18.25-27)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자 스승을 팔아 넘긴 유다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마태 27,3-5) 다른 제자들도 스승을 버린 채 도망치고 흩어진 가운데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과 오직 한 제자의 눈앞에서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 그러나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복음선포의 마지막 지상사명을 내리시고 승천하셨다.(마태 28,16-20; 루가 24,51)

이제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파견과 강림을 앞두고 우리는 오늘 요한복음의 마지막 추가편집 부분인 21장의 내용 중 "베드로와 예수의 관계회복과 예수의 마지막 당부"(21,15-19)에 관한 내용을 미사복음으로 듣는다. 죽음 직전에 공동체의 일치를 그렇게 강조하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21,14), 베드로 사도를 따로 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고 그에게 "주님의 양떼"를 맡기심으로써 베드로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다. 아울러 베드로의 남은 삶이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신다. 무대는 티베리아 호숫가, 베드로가 제자로 불림을 받기 전에 본업(本業)으로 고기를 잡던 갈릴래아 호수다.(마태 4,18-20)

부활하신 예수와 열 한 명의 제자들 모두가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는 단독으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르신다. 예수님의 의도는 부활하신 후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발현에서 시몬 베드로를 따로 세워 아주 중요한 것을 맡기려 하심이 분명하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 누구인가?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를 뵙고 형인 시몬에게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자 둘이 함께 예수를 찾아간다. 그 때 예수께서 단번에 시몬을 알아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고 불렀던 이름이다.(요한 1,41-42)

이 이름을 오늘 다시 부르신다. 이는 베드로가 부름을 받기 전의 이름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함으로써(요한 18,15-18.25-27) 제자의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명(召命) 이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인가? 이는 우리 모두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대목이다. 제자의 자격이란 한번의 소명으로 주어지고 또 그렇게 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머물고 있는 그 순간이 바로 "제자로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사랑을 다짐받는다. 이는 처절하리만큼 잔인한 과정을 통하여 얻어내는 다짐이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세 번씩이나 던지는 스승의 질문에 스승을 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베드로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만다. 스승을 배반하고 흘렸던 그 때와 같은 눈물일까?(마태 26,75) 아니다. 이는 배반했기 때문에 흘리는 통한(痛恨)의 눈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환희(歡喜)와 간절함과 다짐의 눈물이다.

이제 베드로는 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주님의 양떼를 잘 "돌보는 것"임을, "하나되게 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19절).........◆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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