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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소유의 진정한 주인은? /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06 조회수693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려라.”(마르코 12,17)


 

Repay to Caesar what belongs to Caesar
and to God what belongs to God.”
They were utterly amazed at him.

 

 

 

 예수님께서는 시험하려고 묻는 바리사이 사람들의 질문에 지혜롭게 답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있는지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나의 재산, 나의 가족, 나의 건강,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생명……. 우리는 그렇게 많이 받은 것 가운데 얼마나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고 있습니까? 시간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립니까? 주일 미사 한 시간도 힘들어 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받은 재산은 어떻습니까? 어느새 늘 달라고 청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이 선심을 썼는데 감사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에 인색한 우리에게 그분께서는 어떤 마음이 드실까요?

 

 

                                  모든 소유의 진정한 주인은?

 

  어제 월요일부터 우리는 다시금 연중시기를 맞이하였다. 성령강림대축일로 부활시기가 막을 내렸고, 사순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로 중단되었던 연중시기가 계속된 것이다. 연중시기는 편의상 연중시기 제1기와 제2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성탄시기를 마무리하는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재의 수요일 직전 화요일까지를 말한다. 제2기는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한해의 전례력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일 직전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를 말한다. 연중시기 제1기와 제2기의 구별은 정확하지 않다. 즉, 전체 연중시기는 34주간으로 구성되는데 어느 주간에서 정확히 중단되었다가 어느 주간부터 재계되는지가 정확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매년 달라지는 부활대축일(춘분이 지난 후 보름 다음에 오는 일요일) 때문이다. 매년 부활대축일이 정해지면 부활절 50일, 사순절 40일에 따라 연중시기 제1기가 8주간, 또는 9주간을 중단되었다가 제2기가 9주간, 또는 10주간으로 다시 계속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연중시기 한 주간 정도가 생략되기도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연중시기는 연중 제34주간으로 마쳐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연중시기 평일미사에 봉독되는 복음을 살펴보자. 연중시기에는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이 차례로 사용되는데, 마르코복음은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9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마르 1,14에서 마르 12,44까지가 봉독된다.(마르 1,14-12,44) 마태오복음은 그 다음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마태 5,1에서 마태 25,30까지가 봉독된다.(마태 5,1-25,30) 루가복음은 그 다음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시기의 마지막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루가 4,16에서 루가 20,40까지가 봉독된다.(루가 4,16-20,40) 물론 중간에 생략되는 부분도 많다.  

 

  연중시기에 사제는 녹색 제의와 영대를 착용하고 미사를 봉헌한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을 주며, 희망·겸손·인내·차분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연중시기는 한해의 전례력 중 대림·성탄·사순·부활시기 같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드러난 특수한 신비를 고려하지 않고 이를 포괄적으로 기념하며 지내는 시기이다. 한 마디로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따라잡기"의 시기인 것이다. 마르코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에서 시작된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비록 강제로 중단된 것이지만 이로 인해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절대절명의 언명(言明) 속에 간단명료하게 선포되었다. 이 복음은 세상창조 때 이미 계획되고 약속된 것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림을 거쳐 예수님과 함께 성취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은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스스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뜻한다.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세상이 취할 태도는 회개(悔改)와 믿음이다. 회개는 죄악의 세계에 빠진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회개는 여태껏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고 전환하여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질서 지우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복음을 수락하고, 수락하였다는 표시를 보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즉, 기쁜 소식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은 추종(追從)이다. 모든 믿음이 다 적극적인 추종일 수는 없지만, "나를 따라오너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인 추종이 필요하다. 성소(聖召)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추종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뚜렷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 복음선포의 길에 초대받은 자들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복음이 말하는 가르침을 자신이 먼저 받아들이고 삶의 지침으로 행(行)해야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주는 가르침을 누구보다 먼저 배워 익혀야 하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요지의 오늘 복음은 앞서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르 12,1-12) 말씀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포도원을 그 주인의 종들과 아들까지 살해하고 가로채려는 욕심 많은 소작인들의 말로(末路)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의 최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비유 속에 암시되었다. 이에 격심한 그들이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세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실 유다인들 모두가 그들의 주인을 상징하는 로마황제(카이사르)에게 주민세를 내고 있었으므로 백성의 지도자들은 속으로 적지 않은 갈등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황제를 통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민세를 내자니 유일신 야훼 하느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격이 되고, 내지 말자니 황제를 부정하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국사범으로 몰릴 진퇴양난의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의 가슴앓이를 예수의 것이 된 셈이다.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신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이 이어진다. "왜 나의 속을 떠보는 거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다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15-17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여 뒤로 나자빠질 대답이었다. 사실 "황제의 흉상과 글자가 박힌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라"는 말씀으로 끝맺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에 예수님의 의도가 실려있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은(창세 1,27) 과연 누구의 것인가? 황제가 주조한 화폐는 황제에게 돌리면 끝나지만, 우리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모든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힘이다. 나아가 인간의 모든 것이 행하는 일과, 이 일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의 것이라는 모두가 잠시의 소유에 불과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영원한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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