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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등대지기의 꿈 / 전 원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10 조회수584 추천수4 반대(0) 신고

등대지기의 꿈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등대지기가 되고 싶은 생각에 깊이 빠져든 적이 있었습니다. 바다에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빛과 바람과 파도와, 끝없이 펼쳐지는 그 무한의 세계 같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어줍잖게 통기타를 배우며 ‘등대지기’라는 노랫말을 읊조리면서부터는 어느 외딴섬의 등대지기가 되고 싶은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습니다. 낮이면 갈매기와 파도의 친구가 되고, 어둔 밤이면 길을 잃은 밤배들을 인도하며 살아가는 등대지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진실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외딴섬에 홀로 살아가는 등대지기를 만나 그의 아름다운 삶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깊게 패인 눈매, 무한을 바라보는 듯한 맑은 시선, 거룩하고 온화한 할아버지 모습의 등대지기를 동경하며 나는 등대가 있는 외딴섬을 찾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늘 어린 아이로만 바라보던 주변의 환경은 나의 이런 꿈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외딴섬의 등대를 찾은 것은 어른이 된지 훨씬 후의 일입니다.

 

내가 찾아간 등대가 있는 외딴섬은 여수에서 뱃길로 4시간이나 더 가는 곳이었습니다. 몇 해 전 유조선이 좌초하여 지금은 기름띠가 가시지 않아 오염된 섬으로 낙인 찍혀 있지만, 그때는 푸른 파도가 일렁이고 수평선 너머로 갈매기가 날개 짓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섬이었습니다. 그 섬의 벼랑 끝에는 하얀 등대가 그림처럼 서 있었습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맨 먼저 섬의 끝자락 등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젊은 등대수가 불청객의 청년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도표를 꺼내 보이며 마치 상관에게 실적을 보고하는 사람처럼 등대의 제원, 점등시간, 배의 운항횟수 등을 조목조목 깊어가며 자랑스럽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기대하던 등대지기의 거룩한 마음과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는 끝내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등대지기로서 겪는 온갖 불만을 토로하며 앞으로 1년만 이곳에서 견디면 공무원이기 때문에 좋은 보직과 진급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만 들려줄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가슴속에 한 켠에 고이 안고 살았던 등대지기의 꿈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풍랑 때문에 며칠을 그 섬에 머물렀지만, 나는 그 등대를 두 번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요즘 가끔씩 늦은 밤 명동성당 마당을 배회하다가 컴컴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종탑과 유난히 밝게 비치는 노오란 시계 불빛을 바라보며 잊혀진 등대지기의 꿈을 다시 끄집어 냅니다. 아프도록 아름다운 그 꿈속의 등대와 등대지기는 결코 만나지 못할지라도, 내 가슴 한 켠에서 허물어진 그 꿈만은 다시 꾸며 살고 싶어졌습니다. 아니 꿈만이 아니라 외딴섬을 찾아나서던 그 심정으로 나의 길을 가고 싶어졌습니다. 등대를 닮은 이 명동성당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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