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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삼위일체의 신비 / 조규만 주교님 강론 말씀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11 조회수848 추천수4 반대(0) 신고
 

6월 11일 (일)요일 삼위일체 대축일 (마태 28, 16-20)

 

찬미 예수님!

 

오늘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어려운 신비중의 하나인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이면서 어떻게 세 위격이시고, 또 세 위격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믿으라고 하니까 참 답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도대체 머리가 모자라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일까? 아니면 그냥 믿으라고 하니까 무조건 믿는 맹신자들만 모인 곳일까? 교회는 아주 교묘한 속임수로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삼위일체에 대해 아오스딩 성인이 바닷가에서 만난 소년으로부터 들은 "조개껍질과 바다 이야기", "삼각형" 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에 나타나는 하느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고 하는데 성부도 하느님이시고 성자도 하느님이시며 성령도 하느님이십니다.

 

교회는 이것을 여러 사람들이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하려면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하면, 신자들이 알아듣기 쉽지 않겠느냐? 고 옛날에 많은 학자들이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천지 창조 때의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2000년전에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다음에는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옛날 그리스에는 일찌기 연극이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지금처럼 그렇게 재주가 많은 사람들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배우 혼자 나와서 한 번은 아버지 가면을 쓰고, 또 한 번은 아들의 가면을 쓰고 이렇게 1인 다역을 하면서 연극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분이신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설명하면 알아듣기는 쉽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게쎄마니 동산에 가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울며 불며 기도하셨던 모습은 철저하게 연극이고 기만이며 자기가 자기한테 한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을 기만하는 그런 하느님을 믿으라는 것입니까? 또 다른 신학자들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말하는, 다빈치 코드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옛날의 신학자들이 하느님은 한 분 뿐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와 같이 "야훼 바로 그분이 위로 하늘에 계시고 아래로 땅위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분밖에 다른 하느님은 없다."(신명 4, 39)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이 워낙 착하고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들로 승격시켜 주었다." 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양자 입양설이라고 합니다. 원래 인간이었는데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알아듣기는 쉬운데,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죄 ' 라고 하면 그 자체로 큰 죄, 작은 죄가 있습니다.  때리는 죄보다 죽이는 죄가 더 큰 죄입니다. 그런데 어떤 죄는 똑같은 죄라도 상대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똑같은 크기로 때렸는데, 동생을 때린것과 아버지를 때린것은  다릅니다. 똑같은 크기로 하느님을 때렸습니다.

 

동생을 때린것을 아버지는 용서할 수 있지만, 아버지 자신을 때린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크기로 하느님을 때렸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잘못한 것을 어느 어줍짢은 사람의 속죄로 용서가 되는 일입니까?

 

바로 우리 교회는 이런 이유 때문에 양자 입양설을 거부합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은 모두 다 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의 하느님의 모습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란 끝까지 인간이 만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하느님을 내가 내 머리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자체는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30년, 40년 함께 살아 온 남편과 아내에 대해 다 알고 있습니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의 삼위일체 하느님이 우리가 살아야 할 목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가 되지요? 쇠와 같이 용접을 하면 하나가 됩니까? 남편이 그냥 반지 사주고 목걸이 사주면 하나가 됩니까? 북한에 돈 퍼다주면 우리나라가 하나가 됩니까? 남북이 하나가 되고 우리 공동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모든 일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성부 하느님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저는 성부 하느님을 옛날 도덕책에 나오는, 금도끼도 주고 은도끼도 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상상을 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태리의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그려져 있는 하느님은 할아버지인데 근육질의 하느님의 모습이지만, 제가 상상한 하느님은 호리호리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버지 같은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필립보라는 제자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을 때. "나를 보면서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무슨 소리냐?" 고 하셨습니다.

 

차두리를 보면 차범근을 알 수 있습니다. 차두리가 공을 차는 것을 보면 차범근이 공을 차는 법과 많이 닮았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공을 차는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자는 복음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잇습니다. 착한 목자, 병을 고쳐 주시는 분,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그것과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성령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가끔 성령을 비둘기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가 성령은 아닙니다. 로마에 가면 비둘기가 하도 많아서 골치입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지저분한 것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아니러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평화의 상징입니다.

 

성령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이상한 언어를 말하고 알아듣게 하십니다. 병고치는 은사와 여러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갑자기 사도들을 용감한 사람들로 변신시키기도 하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성부도 하느님이시고 성자도 하느님이시고 성령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한 분의 아버지이시지 세분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한 분의 아들이시지 세분의 아들이 아닙니다. 한 분의 성령이시지 세 분의 성령이 아니십니다. 이 세분의 삼위 안에는 앞섬이나 뒤섬도 없고, 삼위 모두 같은 영원성과 동등성을 지니셨습니다.

 

삼위는 흠숭되어야 합니다. 크거나 작거나 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높음도 낮음도, 앞섬도 뒤섬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더 많다고 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주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해 주기를 더 바랄 것입니다. 하느님도 당신에 대해서 알아주는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 주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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