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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집념과 순종 / 송봉모 신부님 <2>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12 조회수920 추천수18 반대(0) 신고

 

이 글은 송봉모 신부님의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이란 강의 테잎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 (2)

 

 

한편 그의 아들 요셉의 생을 보겠습니다. 형의 질투를 사서 살해당할뻔 하다가 열일곱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집트 노예로 끌려 갔습니다. 노예생활 10년 째, 상전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그런 무고한 죄를 받아 강간 미수죄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무기수로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돌보심속에 3년 후에 옥살이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누구의 생이 더 고통스러울까요? 언뜻 보면 야곱의 생이 더 고통스럽고 더 비참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비교해 봅시다. 야곱의 생일까요? 요셈의 생일까요? 야곱은 유랑생활을 했지만 요셉처럼 노예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14년 동안 땡전하나 건지지 못하고 일을 했지만 그래도 자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철저히 자기 자유가 없는 노예신분이었습니다.

 

또 야곱옆에는 사랑하는 연인 라헬이 있었지만, 요셉옆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상전의 부인이 끊임없이 성적 시달림을 했습니다. 요셉은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무기수로서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의 생이 아버지 야곱보다 훨씬 힘겹고 고통스럽고 또 내일을 모르는 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야곱과 요셉의 생을 비교하면 야곱의 생은 참 힘들게 보이는데 요셉의 생은 미풍에 돛단배 가듯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아버지 생은 더 힘겹게 보고 아들의 생은 더 축복 받은 것처럼 보일까요? 그것은 야곱의 집념과 요셉의 순종때문에 그렇습니다. 야곱은 집념이 컸기 때문에 하느님을 향한 의탁과 항복이 무척 늦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눈여겨 보시게 되면 야곱이 하느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참 뒤에 나옵니다. 한편 요셉은 어떤 처지에서든 항시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순리대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보다는 축복이 더 부각됐던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된 삶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비극적 사건앞에서 굴복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어떤 시련이 온다해도 그는 늘 하느님안에서 그 시련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선의대로 요셉의 생을 이끌어줄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점이 항시 하느님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창세기를 다시 읽어본다면 요셉의 이야기를 읽을 때 항상 주어가 하느님입니다. 제가 몇가지 증거를 드립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파라오의 두 시종장이 꿈을 꾸고 그 꿈 앞에서 요셉에게 해몽을 청합니다. 그 때 요셉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 쉽지 않습니다. 요셉이 꿈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꿈 이야기를 하니까 "하느님만이 꿈을 해석하실 분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황제 파라오가 역시 꿈을 해석해 달라고 했을 때도 파라오 앞에서 자기가 해석하는 식으로 하면 얼마나 ... 우리들의 심리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푸는 능력이 있어서 꿈을 해석하겠습니까? 폐하께 꿈을 해석해 줄 분은 하느님 뿐이십니다." 그는 하느님 뿐입니다.

 

긴 세월이 지나 형님들을 만났을 때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목숨을 살려주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온 땅에 통치지가 됐습니다.

 

파라오의 재상으로서, 요셉을 통치자로 임명한 분은 분명히 파라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에집트를 다스리는 재상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는 여려운 시간이나, 영화로운 시간이나 항상 주어가 하느님입니다. 야곱이 죽기 직전에 요셉의 두 아들 축복 주려고 불렀습니다. "애들은 누구냐?" 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저를 위해서 주신 아들입니다." 라고 얘기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요셉의 삶은 철저히 하느님 중심입니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기를 돌볼거라는 것을 끝까지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그런 고통에 밀어 넣는 형들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그것을, 상처를 할퀴면서 저주하면서 그 고통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편안함이든, 고통이든 항시 하느님과 함께 받아들였던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안에 하느님이 현존하는지 현존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신앙인 안에 그의 마음과 삶속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있다 없다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누리는 마음의 평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시련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더 위대하신 분, 우리 주님을 보게 됩니다. 바로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 늘 평화를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기 때문에 요셉의 삶이 그렇게 힘겹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은 보이는게 집념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도 힘겹게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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