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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다/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16 조회수674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6년 6월 16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마태오 5,29)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tear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to have your whole body thrown into Gehenna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게 하는 몸의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치십니다

 

☆☆☆

 

 우리는, 하느님은 크고 놀라운 사건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분으로 자주 착각합니다. 아니 우리는 어떤 일이 크고 놀라운 사건인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대수롭지도 않은 평범한 일처럼 여겼던 것이 지나고 보면 크고 대단했던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셨던 일들입니다. 내가 심사숙고 끝에, 또는 어쩌다가 내린 결정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뒤늦게 깨닫는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엘리야 예언자와는 달리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다 - 마음의 죄도 NO !

어제복음부터 산상설교의 본격적인 대당명제인 "살인하지 말라 -> 화도 내지 말라"를 선언에 이어서 오늘은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 그리고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疎薄)하지 말라"는 세 번째 대당명제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즘 성(性)을 상품화하는 사회적 풍토나, 아직 자립할 수도 없는 어린 사람과의 원조교제나, 돈만 된다면 어디나 비집고 들어서는 러브호텔 건립 등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인간은 왜 이럴까?" 하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성에 대한 인간의 욕정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의 혼인법은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고, 일부다처제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신명 21,15) 그들은 항상 여자는 남자에게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였고, 경건한 자들은 여자가 다가오면 인사를 하기는커녕 아예 눈을 감아 버렸으며, 결혼한 여자가 독신 남자나 비유대인과 성적 관계를 맺으면 간음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혼인한 남자가 그와 동일한 행위를 해도 간음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당시에 여자는 남자와 동일한 차원에서 취급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혼인법이 완전히 남자의 편에서부터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간음을 예방하려는 경우에도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려기 보다는 여자의 위험성을 더 강조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남의 아내를 유혹하는 남자는 자신의 혼인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혼인을 깨뜨리는 셈이 됩니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는 듯 보이는데,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같은 내용에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라는 단서가 붙습니다(5,32; 9,9). 이 단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이것이 특별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는 말씀이 아니냐라는 오래되고 어려운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데에 예수님 말씀의 원뜻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가정, 그리고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고, 그동안 여자에게만 지워져 있던 간음이라는 죄가 남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대당명제가 등장하는데, 이는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는 것과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하지 말라"(31-32절)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6계명은 "간음하지 말라"(출애 20,14; 신명 5,18)는 것이며, 제9계명은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애 20,17; 신명 5,21)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음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구약의 율법이나 오늘날 현대의 법률 모두가 "부부가 아닌 남녀간의 외적으로 성사된 성적 행위"를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뒤집는데, 첫째 대당명제(21-26절)에서 화를 내는 것이 살인과 같은 비중을 지닌 것으로 엄하게 경고되었듯이, 둘째 대당명제에서도 내적인 "음란한 생각"이 외적인 "간음한 행위"와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여기서 음란한 생각은 "눈"(29절)으로, 간음한 행위는 "손"(30절)에 비유됨을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눈과 손은 엄연히 다른데, 예수께서는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이고, 따라서 손이 행한 외적인 범행은 마땅히 죄가 될 뿐더러,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품는 음란한 생각조차 죄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논리가 이렇다면, 세 번째 대당명제도 자동적으로 이해됩니다. 즉 음행한 경우이든, 다른 어떠한 경우이든 간에 아내에게 이혼장을 손에 쥐어 소박하게 되면, 그 버림받은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예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한 번 맺은 부부관계는 죽음이 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다는 결혼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남자가 품는 여자에 대한 음란한 생각이 이미 여자의 혼인을 깨뜨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경고하시고, 여성의 권리와 생활을 중시하시면서 여성의 권리와 생활이 남성의 욕망에 의해 위협받아서는 아니 됨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오직 혼인의 본질과 목적만 있을 뿐입니다. 혼인의 본질은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이며, 혼인의 목적은 부부사랑과 자녀출산입니다. 여기서 혼인본질의 단일성이란 한 남자(여자)는 한 여자(남자)만을 배우자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불가해소성은 부부의 결합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것이므로 죽음이 이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세상의 어떤 힘도 이를 갈라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혼인의 본질과 목적이 이토록 숭고하다 할지라도 혼인은 하느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인 만큼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혼인의 숭고한 본질과 목적은 인간의 자유로운 합의와 굳건한 신의에 의해 지켜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혼인에서 빚어지는 많은 문제들은 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서약"에 있는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겠노라 한 그 약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약속은 지켜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죠, 혼인의 순간에 서로가 쌍방에게 주고받은 사랑과 존경과 신의의 서약이 문제해결의 실마리입니다. 이런 서약은 배우자 쌍방의 서약이기 이전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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